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디플레이션(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경제활동이 침체되는 현상)’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로 간신히 1%대에 턱걸이했고, ‘경기 온도계’로 불리는 근원물가는 20년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상승률을 보였다.
2일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 지수는 전년 동월보다 1.0% 오른 105.54로 집계됐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2개월 내내 1%를 밑돌더니 1965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낮은 0.4%를 기록했다. 올해 들어선 1월 1.5%로 회복됐으나 2월 1.1%, 3월 1.0% 등 다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지난 2월부터 본격화된 코로나19 확산으로 소비·투자 등이 위축된 탓이다.
지난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근원물가(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 지수)는 0.4% 오르는 데 그쳤다. 외환위기 때인 1999년 12월(0.1%) 후 20년 만의 최저치다. 소비 침체 등으로 수요 측면 물가 상승 압력이 현저히 떨어졌음을 뜻한다. 근원물가는 날씨 등 외부 요인에 따라 물가 변동이 심한 품목을 제외한 물가 지표다.
외식·여행·개인서비스 등 가격이 담긴 서비스 물가 상승률도 0.5%에 머물렀다. 1999년 12월 이후 가장 낮았던 지난 2월(0.4%)과 비슷한 수준이다. 호텔숙박료는 5.2% 하락해 2010년 8월(-9.4%) 후 최저였고, 콘도 이용료도 3.1% 하락했다. 서울 마포구의 미용실에서 일하는 정모씨는 “한 달 주기로 머리를 자르던 고객들이 두 달이 넘도록 오질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관이나 유원지를 찾는 발걸음이 끊기면서 오락 및 문화 물가도 1.3% 하락했다. 2006년 9월(-3.6%) 후 가장 낮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 1월 1684만 명이던 영화관 관객 수는 지난달 1~29일 172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소형승용차(-2.3%), 대형승용차(-1.1%), TV(-10.2%) 등의 가격도 줄줄이 내렸다. 소비 부진과 함께 자동차 개별소비세 인하 등 요인도 작용했다.
코로나19가 모든 물가를 끌어내린 것은 아니다. 집에서 음식을 요리하거나 배달하는 사람이 늘면서 축산물(6.7%)과 수산물(7.3%), 가공식품(1.7%) 가격은 뛰었다. 국내 주식시장 전반이 침체된 가운데서도 CJ제일제당, 농심, 오리온 등 식품업체 주가는 연일 상승세인 이유도 ‘집콕(집에 콕 박혀 있는 것)’ 소비가 늘어난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집콕 소비 증가는 유류세 인하 종료에 따른 석유류 가격 상승과 함께 지난달 물가 상승률이 0%대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줬다.
하지만 물가는 경기 영향이 천천히 반영되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저물가가 더 심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코로나19로 수요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고 국제 유가도 하락세여서 조만간 물가 상승률이 0%대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디플레이션 우려도 나온다. 지난달 16일 열린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을 보면 한 금통위원은 “코로나19 사태가 총수요 충격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수요 위축이 장기화될 경우 디플레이션 위험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물가 하락을 뜻하는 디플레이션은 기업 수익성 하락→투자 감소→고용 부진→가계소득 하락 등으로 이어져 경제에 치명적이다.
김 교수는 “코로나19 확산 속도를 늦춰 경제 활동이 정상 궤도로 올라오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이후엔 재정, 세제 등 정책 수단을 총동원해 소비와 투자 회복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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