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돈살포 안돼…경제 기저질환부터 고쳐라"

입력 2020-04-03 17:36   수정 2020-04-04 00:15


“미증유의 비상경제시국” “무슨 수단이든 총동원” “전례 없는 특단의 파격적 대책” “중요한 것은 속도”. 최근의 경제 상황을 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되풀이해 언급한 표현이다. 찬성한다. 당연한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두 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첫째는 재정 금융 정책이 규모 면에서 파격적이면 그만큼 더 비용 대비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본질적으로 실물 위기이고, 그 피해도 업종·계층에 따라 차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가구에 뿌려주는 기본소득 같은 무차별적인 수단을 남용할 때는 아니라고 본다.

정부가 재정 수단을 더 강조하는 것을 보면 금융 여력이 별로 없고, 부작용도 우려되고, 효과도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기업이나 개인이나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피해는 융자 지원으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고 감세와 재난보조금 지급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난보조금의 총액이 같다면 무차별적으로 주어질 때보다 피해가 큰 사람에게 선별적으로 지급될 때 효과가 더 클 것이다.

대면과 집합을 하지 않고는 영업이 거의 불가능한 공연, 전시, 관광, 음식, 숙박업 등 코로나19 사태로 피해가 집중된 업종의 기업과 종업원에 대한 지원이라면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매출이 오히려 늘어난 온라인 판매, 택배업과 그 종사자, 또는 월급이 준 것도 아니고 실직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닌 공무원과 공기업 종사자에게까지 현금을 나눠 준다면 찬성하기가 어렵다.

둘째는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을 해내야 한다. 전례 없는 규모로 돈을 써 대는 것만 아니라 이전의 어느 정부도 못 한 규제개혁, 노동개혁을 이뤄 민간 경제의 자생력을 살려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못 바꾸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

재정 금융정책과 같은 거시적·양적 수단으로는 코로나19 사태로 받은 타격을 회복할 수는 있어도 그전부터 있었던 한국 경제의 기저질환을 치유하지는 못한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일회성 수요 진작 위해 다음 세대 몫까지 써선 곤란
노동·규제개혁과 병행돼야 '소주성' 효과 제대로 나타날 것


현금 살포를 최소한에 그쳐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이미 본예산 자체가 유례없는 적자로 짜여 있기 때문에 추가 지출은 모두 추가 재정적자를 의미하는데, 국가채무비율 40%가 무슨 절대적인 원칙은 아니더라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다음 세대라고 이런 위기를 맞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는데 다음 세대가 위기 극복을 위해 써야 할지도 모르는 수단을 현세대가 소진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식으로 국가부채가 늘어나고 환율이 요동치면 조만간 국가신용도가 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채 발행 자체가 어려워지고 이자율이 급등할 수도 있다. 운신의 폭이 점점 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로나 위기를 경제 기저질환 치유 기회로

개인에 대한 이런 식의 지원이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되는 것을 직시하고 일자리를 지킬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영세자영업자도 기업이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부가 무한정 지원해줄 수는 없다. 오직 기업만이 매달 몇백만원의 지속가능한 소득을 창출해 줄 수 있다. 개인은 표가 있고 기업은 표가 없다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피해가 없는 사람에게까지 현금을 살포하자는 것은 ‘소득주도성장’의 논리에 입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가계 수요를 늘려주면 장사가 잘되는 기업이 투자를 하고 일자리도 늘려서 다시 수요가 증가하는 경제의 확대선순환이 가능할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가 규제와 노동시장 경직성 때문에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바다. 재정지출이 끊어지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일회성 수요 진작 효과를 위해서 다음 세대의 몫을 우리가 써서는 안 된다. 다음 세대까지 누릴 효과가 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아직도 소득주도성장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며 규제 혁파와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등이 병행돼 수요-투자-일자리-수요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가능하게 하면 ‘일자리 정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투자 일자리 막는 장애물부터 제거해야

한국 경제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이미 위기였고 그 본질은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거의 창출해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국민 세금으로 월 27만원 용돈벌이를 하는 노인들로 취업자를 늘린 분식회계성 고용 통계는 아무 가치가 없다. 국민 중 도대체 몇 명이나 고용 통계를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은가? 국민은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고용 상황이 이미 심각하다는 것을 그냥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국민은 일자리 상황을 통계를 보고 아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19에 대응한 재정 금융정책과 함께 한국 경제의 만성질환을 치유하기 위한 일들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전례 없는 특단의 대책은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막고 있는 모든 장애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부 스스로 정책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옳은 정책이지만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주장하던 정책에 대해 ‘상황이 워낙 엄중하니 방향과 속도를 조금 조절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할 여지가 생긴 셈이다. 탈(脫)원전,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기득권의 저항이 배후에 있는 규제나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같은 투자 저해 요인도 마찬가지다. 이런 위기상황이야말로 기득권자를 설득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다. 자영업자의 폐업과 근로자의 일자리 상실을 막기 위해서 전례 없는 엄청난 지원을 하는 판에 일자리 만들기의 장애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도 같은 정도의 지출을 할 수 있다는 설득을 해야 한다. 규제개혁에 대한 저항도 돈으로 틀어막을 수 있으면 한번 해 보자는 말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부터 세 정부에 걸쳐 고용 창출 노력이 모두 허사에 그쳤던 이유도 재정 금융정책 등 거시정책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다시 되풀이한다. 아무것도 안 바꾸면 아무것도 못 바꿀 것이다.

안민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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