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녹색정책(그린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좌초 위기에 처했다. 오는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EU 녹색정책이 코로나19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아 전면적인 계획 수정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5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에선 코로나19 사태가 불거진 후 녹색정책에 대한 논의가 사라졌다”며 “2050년까지 유럽을 최초의 탄소중립 대륙으로 만들겠다는 EU의 목표가 무산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오는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릴 예정이던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도 취소됐다. 기후변화 당사국총회는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탄소배출 감축 노력을 조율하고 협상하는 다자외교 무대로, 지구촌 최대 ‘기후 올림픽’으로 불린다.
유럽을 이끄는 두 축인 EU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해 말부터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 왔다. 지난해 말 잇따라 취임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녹색정책을 올해 최우선 핵심 추진과제로 제시했다.
목표는 오는 2050년까지 실질적인 탄소 순배출 총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분야 기업에겐 대출 규제를 완화해주고, 화석연료 사업에 대한 투자는 대폭 줄이는 등 녹색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ECB의 통화정책을 활용해 재생에너지 분야 기업 채권을 대거 매입하는 이른바 ‘녹색 양적완화’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EU는 당초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세부계획을 올 상반기에 확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으로 유럽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받으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EU 집행위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던 지난달 4일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을 제로로 만드는 목표를 담은 ‘유럽 기후법안’을 공개했다. 그러나 최종 목표만 제시한 채 중간 단계의 목표는 설정하지 않았다.
당초 EU는 2030년까지의 EU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1990년 대비 40%에서 55%까지 높이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번 기후법안에 이 같은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2030년까지 이 목표치를 달성하려면 녹색산업 등에 매년 최소 2600억유로(347조원)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 금융시장과 실물경제가 침체되고 실업자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 규모의 추가 투자는 불가능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EU는 코로나19라는 경제충격을 감안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담은 목표를 조만간 내놓겠다는 계획이다.
EU가 녹색정책의 지속적인 이행을 위해 올 초 내놓은 1조 유로(1334조원) 규모의 투자계획도 대폭 수정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재생에너지 확대 등을 위해 오는 2030년까지 1조 유로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투자 재원의 절반 이상은 EU 예산에서 충당된다. 그러나 코로나19로 회원국 및 EU 기업들이 막대한 타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EU 재원을 구제금융에 투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EU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ECB가 내세운 녹색 양적완화도 사실상 무산됐다. 앞서 ECB는 지난달 18일 7500억유로(1001조원)를 추가로 투입해 연말까지 국채와 회사채를 매입하겠다는 양적완화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시행 중인 월 200억유로(26조7000억원)의 채권매입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이번 채권매입은 탄소 배출량과 관계없이 모든 업종에 속한 기업들이 대상이다. 항공기와 자동차 등 전통적인 탄소배출업종에 속하는 기업들의 채권도 ECB가 매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와중에 재생에너지 등 녹색산업에 대한 섣부른 대출규제 완화 및 채권 매입이 은행 부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의식한 것으로 분석된다. 당초 ECB는 올 초까지만 하더라도 양적완화를 통해 재생에너지 분야 기업 채권을 대거 매입하고, 탄소배출업종 기업 채권은 거의 매입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EU 집행위원회와 ECB는 코로나19로 고사 위기에 처한 항공 및 자동차 산업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도 검토하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탄소배출량을 낮추기 위해 유럽이 오랫동안 추진한 녹색정책이 코로나19로 인해 몇 주만에 타격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EU의 녹색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던 체코와 폴란드 등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녹색정책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환경단체들은 전 세계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규제하기로 한 파리기후협약이 코로나19 사태로 유명무실화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이 지난해 11월 파리기후협약에서 공식 탈퇴한 상황에서 유럽 기업들만 환경규제를 받으면 경쟁력을 급속히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서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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