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지금까지도 ‘선동의 제왕’으로 불리는 독일 나치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한 말이다. 국민들이 경제난이나 정치적 혼란 등 내부 문제에 염증을 느끼는 심리를 이용해 여론을 ‘나’와 ‘너’로 나누고, ‘나’를 상징하는 각종 슬로건과 로고를 만든 뒤 ‘나를 대표하는 지도자’를 따르도록 교묘히 이끄는 전략이다. 당시 독일에서 그런 지도자는 아돌프 히틀러였고, 괴벨스는 히틀러를 ‘독일 국민의 대변자’로 포장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이란 구호도 그렇게 탄생했다.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 대해 논했던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으로 돌아왔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워싱턴DC 정가에서 거의 예상치 못했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당선, 영국 국민이 투표를 통해 선택한 유럽연합(EU) 탈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발호 등 언뜻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정치적 현상들에 대해 논한다.
후쿠야마는 이런 양상을 개인과 집단이 지닌 ‘인정에 대한 욕구’와 ‘타자 혐오’, 이를 파고드는 ‘포퓰리즘 정치’ 등 세 가지 주제로 접근한다. 이제 유권자들은 더 이상 ‘엘리트 정당’이 자신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차마 외부에 드러내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배타심, 부유해지고 싶다는 갈망, 소외되지 않았다는 위로를 원한다.
저자는 특히 누군가에게 명예롭고 우월한 존재가 되기를 열망하며 “나를 알아달라”, “내가 소속된 곳을 지키고 싶다”고 외치는 ‘투모스’에 집중한다. 투모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전투 중에 타오르는 용기와 기백, 자부심을 표현할 때 쓴 단어다. 이 책에선 인간이 ‘존엄성 있는 자아’로 살고자 하는 투지와 그로 인해 결정되는 정치적 성향 등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원제가 ‘정체성(Identity)’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과거 전통 사회에선 정체성이란 개념이 성립될 수 없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안정된 농업 사회에서 살았다. 이런 체제에선 나이와 성별을 토대로 엄격한 계층이 형성되고, 모두가 농부나 주부 등 같은 직업을 가졌다. 사회적 이동 범위도 매우 좁았다. ‘내가 누구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없었다.
19세기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주의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자아에 대해 성찰하고, 이를 정치적 권리와 법률을 통해 지키고자 했다. 참정권을 요구하며 스스로 체제에 일정 역할을 수행하는 도덕적 행위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근현대 시장경제 체제에선 노동력과 자본,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이동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는 파편화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개인으로서 존중받고자 함과 동시에 안정적 소속감을 제공하는 공동체를 강렬히 원했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이른바 진보 좌파가 왜 최근 들어 세계 각국에서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좌파들은 “노동자 계층 또는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과 같은 커다란 집단을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하는 대신, 특정한 방식으로 소외된, 점점 더 작은 집단들에 집중해왔다”고 설명한다. 대중의 내면 깊이 잠재된 투모스를 읽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세상’에만 집착해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체성은 포퓰리스트 민족주의 운동, 이슬람주의 과격 세력,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많은 정치 현상의 기저에 깔린 공통 테마”라고 강조한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를 정체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못박는다. 이 과정에서 포퓰리즘 정치가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끝없는 분열이라는 두 가지 디스토피아를 낳고 있다고 우려한다. “우리의 나라를 되찾자”, “나와 다른 모든 이는 적이다”라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메시지가 개인의 정체성을 비틀면서 독재 정권에 옹호하도록 유혹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저자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선 “정체성은 분열로 가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통합으로 향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서술한다. 다양성이 증가하는 사회를 고려하되, 그 다양성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갈무리한다.
이 책은 여당의 압승으로 끝난 4·15 총선 결과를 분석하는 길잡이로도 훌륭하다. 지역주의, 세대 차이 대신 개인과 민중의 정체성이란 새로운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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