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란 천자와 천하 사람들 모두에게 함께 적용되는 것입니다(法者天子所與天下公共也).” 중국 한나라 시대 명판관 장석지(張釋之)는 황제에게 “법 앞에선 누구나 다 평등하다”며 대들듯 말했다.
송나라 때 명성을 날린 청백리 판관 포청천(包靑天)은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죄인 앞에서도 당당했다.
이들은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 각 왕조 시기에도 법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인물들이다. 《법으로 읽는 중국 고대사회》는 한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 당시 법률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당대의 사회상을 세밀히 관찰한다. 각 왕조의 법조문, 사법 절차, 형벌, 죄명과 처벌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 책은 국내에 상당히 늦게 번역됐다. 저자인 취퉁쭈(瞿同祖)는 중·일 전쟁 시기였던 1944년 중국 남부 윈난성에서 윈난대 교수로 일하던 시절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시골 농가 한 채를 빌려 살면서 이 책을 썼다. 1947년 정식 출간됐고, 1961년엔 영문판이 나왔다. 중국 법률사를 연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저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중국 각 왕조 법률의 차이보다 큰 틀에서의 공통점에 주목한다. 나라의 주인이 계속 바뀌어도 중국 영토 내 통치 시스템은 크게 변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움직인 원동력을 법률에서 찾는다.
중국 왕조의 법률 분석 키워드로 가족, 혼인, 계급, 샤머니즘과 종교, 유가와 법가사상 등 다섯 가지가 등장한다. 저자는 고대 중국 법률의 기본 정신을 유교 사상 중심인 가족주의와 계급 관념이라고 본다. ‘어질 인(仁)’으로 대표되는 유가적 사랑의 이념이 가족에서 시작해 일반 민중, 귀족, 황실, 나아가 천지만물에 실현되기 위해 법률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사회에서 가족은 비단 사적 영역이 아니라 사회를 형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다. 법률은 가족의 범위와 가부장의 권위, 이를 어길 시 내려지는 형벌을 소상히 결정한다.
혼인은 가문과 가문을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사회의 다양성 속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남녀는 엄격한 예법에 따라 정식 혼인을 치르고 자녀를 낳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혼은 용납되지 않는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 해도 이혼엔 처벌과 금전적 손해가 뒤따른다.
계급은 황실과 귀족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주요 도구다. 중국 역대 왕조에선 옷만 봐도 계급을 알 수 있었다. 특정 계급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옷감과 색, 문양 등을 법에 정해놓았다. 황제와 상급 귀족, 중·하급 귀족 등이 탈 수 있는 수레와 말, 수행 인원수도 달리했다. 귀족은 법을 어겨도 평민에 비해 매우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귀족과 평민 사이에 법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 평민에게 가해지는 형벌이 훨씬 컸다.
이런 관점에서 장석지와 포청천의 행동은 파격적이었다. 법의 공명정대함을 신분제 사회에서 드러내 놓고 강조하는 건 아무리 판관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가적 이념으로 무장한 법률이라 해도 샤머니즘적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귀신이 사람의 선악을 모두 꿰뚫어보고 있다고 여겼다. 관리들은 어려운 사건 판결을 맡았을 때 꿈속에서 신에게 답을 구하거나 향을 피우고 기도했다. 가뭄과 홍수, 지진 등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해 죄인들을 사면했다. 저주가 사람을 질병에 걸리거나 죽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어서 무당을 동원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려는 자는 엄하게 처벌했다.
책의 말미에선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을 비교한다. 유가에서 강조하는 인과 예, 법가에서 강조하는 엄정한 법률 체제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왕조를 지탱하는 법률을 탄생시켰다. 저자는 이를 통해 유가와 법가에서 강조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신분제, 그에 따른 억압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이 책의 분석 대상은 중국 역대 왕조 법률이라는 ‘과거’다. 하지만 역사가 현재를 직시할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하듯이, 이 책 역시 현대 중국 체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중국에선 여전히 국가 최고지도자를 어버이의 이미지로 상징화한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은 지금까지도 신처럼 추앙받는다. 시진핑 현 국가주석은 21세기의 황제가 되고자 한다. 집단지도체제 형식으로 이뤄지는 공산당 독재는 법률의 이름으로 중국 사회를 폐쇄주의적으로 관리한다. 이 책은 이 같은 ‘현대 중국식 법치’의 뿌리를 제대로 보여준다.
번역자 세 명도 모두 중국 사상과 문화 분야 전문가다. 황종원 단국대 철학과 교수가 대표 번역을 맡았고 김여진 강원대 교수, 윤지원 단국대 교수가 공동 번역했다. 각주와 붙임 자료도 풍부하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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