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으로 빚은 모래성의 붕괴 '1997 경제 스릴러'…우린 또 코로나19로 도산위기·실직대란 '데자뷔'

입력 2020-04-27 09:00  


“지금은 삶이 바뀌는 순간이다. 계급, 신분이 싹 다 바뀌는 거다.”

1997년 11월. 고려종합금융에 다니던 윤정학 과장(유아인 분)은 한국의 경제위기를 직감한다. 그는 위기를 인생을 바꿀 기회로 활용하기로 한다. 윤 과장은 달러, 주식, 부동산 등에 순서대로 베팅해 삶을 바꿀 만한 부를 얻게 된다.

2018년 11월 개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재조명받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 충격이 과거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치달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다. 23년 전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고,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잔치는 끝났다’…조용히 덮친 위기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말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전부터 협상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는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1주일 전인 1997년 11월 15일에서 시작한다. 정부와 언론은 한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국은 1년 전인 1996년 12월 세계에서 32번째로 선진국 클럽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영화는 당시 들뜬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한국은행은 동아시아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은 튼튼하다는 보고서를 낸다. 1인당 국민소득은 1만달러를 유지하고 있었고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7%에 달했다.

위기는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영화는 서민들이 주로 듣는 라디오 프로를 통해 오빠가 다니는 회사에서 월급을 안 주고, 엄마 가게에 손님이 없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이 부도가 나서 이사를 가게 됐다는 사연들을 들려준다. 이미 바닥 경제는 침체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 주인공들은 각자 판단을 내린다. 정부와 언론의 장밋빛 전망을 믿던 중소기업 사장 갑수(허준호 분)는 그간의 현금 거래 원칙을 깨고 5억원짜리 어음 계약을 맺었다. 한시현 한은 통화정책팀장(김혜수 분)은 정부를 설득해 위기를 막으려 한다. 재정국 차관(주우진 분)은 불필요한 혼란을 막기 위해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장밋빛 모래성 순식간에 붕괴

당시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과도한 여신(與信)이었다. 장밋빛 미래가 계속될 것이란 믿음에 너도나도 빚을 내 투자와 생산을 했다.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고, 부채로 쌓아올린 경제는 튼튼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버블이 꺼지고 부채 상환이 불가능해진 순간 모래성은 빠르게 무너졌다. 모건스탠리 동아시아 사업부는 11월 15일 모든 투자자에게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메일을 보낸다.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 기업에 빌려준 돈의 만기 연장을 거절하고, 돈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런 실제 상황은 영화에 그대로 묘사된다.

외국인은 연일 한국 기업 주식을 매도했다. 해외 투자자가 빠져나가며 환율이 타격을 받았다. 11월 15일 583.8이던 종합주가지수는 IMF 구제금융 합의안에 서명한 12월 3일 379.3까지 떨어진다. 원·달러 환율 역시 같은 기간 달러당 792원에서 1610원으로 103.2% 급등(원화가치 급락)했다.

총수요곡선의 이동…경기침체의 본격화

마침내 연쇄부도가 시작됐다. 미도파백화점, 해태제과 등 탄탄한 기업들이 잇따라 무너졌다. 재계 서열 4위인 대우그룹마저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정부는 부족한 달러를 구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로 한다. 국가 부도 선언이었다.

IMF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금리 인상, 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요구했다. 이로 인한 충격은 한국의 총수요곡선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했다. 한 나라 경제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 수요량을 의미하는 총수요곡선은 개인의 소비지출, 기업의 투자 지출, 정부의 지출, 순수출의 변화 등에 따라 이동한다. IMF와의 협상안으로 소비 지출, 투자 지출이 모두 줄어드는 가운데 정부 지출은 늘지 않았다. 결국 총수요곡선은 <그래프>처럼 왼쪽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노동 공급 등이 줄며 총공급곡선도 왼쪽으로 이동했다. 한국 경제가 침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IMF와의 협상 내용 준수는 대량해고, 빈부격차 확대 등으로 이어졌다. 1998년 한국은 실업자가 130만 명 발생해 고실업 국가가 됐다. 자살률은 전년 대비 42% 급증했다. 갑수는 끝까지 자기를 믿고 도와주던 거래처에 부도어음을 돌리고 살아남았다. 거래처 사장은 자기 집 안방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다음회에 계속)

강영연 한국경제신문 기자 yykang@hankyung.com

NIE 포인트

① 총수요의 감소가 국내총생산(GDP)과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가.

② 외환 부족에 따른 1997년 외환위기와 코로나19 사태로 비롯한 2020년 세계경제위기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③ 외환위기의 교훈으로 2020년 세계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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