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한일합섬의 추억

입력 2020-04-27 18:01   수정 2020-04-28 00:23

오일 쇼크로 전 국민이 고통받던 1974년 3월 30일. 마산(현 창원시) 양덕동에 있는 한일합섬 방직2부 건물 옥상의 임시교사에서 특별한 입학식이 열렸다. 학생은 한일합섬 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는 여공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일하면서 배우는….” 축사가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장내는 눈물바다가 됐다.

당시 김한수 한일합섬 사장은 중학교를 마치고 돈 벌러 온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세웠다. 학생들의 출신지는 제주를 포함한 전국이었다. 교정에는 이들이 고향에서 뗏장을 한 줌씩 떼어와 깔아놓은 ‘팔도 잔디’가 파랗게 자랐다.

첫해 28학급 1680명으로 시작한 학교는 1980년 120학급에 7200명까지 늘었다. 한 반에 60명씩 부대끼며 주경야독 끝에 ‘빛나는 졸업장’을 받은 학생들은 졸업식장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유정·신성일 주연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에 그 눈물이 흥건하게 배어 있다.

한일합섬은 이보다 10년 전인 1964년에 설립됐다. 서울에서 구로공단이 첫 삽을 뜰 때였다. ‘신비의 섬유’로 불리는 아크릴 섬유를 국내 최초로 생산한 이 회사는 1973년 단일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지금의 한일여고(전 한일여실고) 홈페이지에 있는 한일합섬 사보에 높이 110㎝의 그때 수출탑이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다.

1976년 사원 수 2만7000여 명에 달했던 이 회사는 국제상사 등을 인수하며 승승장구하다 섬유산업 쇠락과 외환위기로 두 차례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었다. 하지만 사원들의 ‘팔도 잔디’ 정신은 스러지지 않았다. 고부가가치 섬유 개발에 집중한 결과 국내 아크릴 원사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견실해졌다. ‘코로나 쇼크’가 닥친 올 2월엔 항균 기능을 추가한 마스크용 부직포의 국내 최대 생산업체로 우뚝 섰다.

섬유산업이 전체 수출액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1970년대, 김해와 수원 대구 공장에도 실업여고를 세워 산업 역군을 길러냈던 한일합섬. 구로공단 여공들과 함께 수출 최전선에서 밤낮없이 땀 흘리던 그 여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동안 회사를 거쳐 간 직원만 30여만 명. 외환위기 때 해체된 여자실업배구단의 최고 공격수 김남순과 세터 이수정도 이젠 추억 속의 스타가 됐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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