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김한수 한일합섬 사장은 중학교를 마치고 돈 벌러 온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세웠다. 학생들의 출신지는 제주를 포함한 전국이었다. 교정에는 이들이 고향에서 뗏장을 한 줌씩 떼어와 깔아놓은 ‘팔도 잔디’가 파랗게 자랐다.
첫해 28학급 1680명으로 시작한 학교는 1980년 120학급에 7200명까지 늘었다. 한 반에 60명씩 부대끼며 주경야독 끝에 ‘빛나는 졸업장’을 받은 학생들은 졸업식장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유정·신성일 주연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에 그 눈물이 흥건하게 배어 있다.
한일합섬은 이보다 10년 전인 1964년에 설립됐다. 서울에서 구로공단이 첫 삽을 뜰 때였다. ‘신비의 섬유’로 불리는 아크릴 섬유를 국내 최초로 생산한 이 회사는 1973년 단일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지금의 한일여고(전 한일여실고) 홈페이지에 있는 한일합섬 사보에 높이 110㎝의 그때 수출탑이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다.
1976년 사원 수 2만7000여 명에 달했던 이 회사는 국제상사 등을 인수하며 승승장구하다 섬유산업 쇠락과 외환위기로 두 차례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었다. 하지만 사원들의 ‘팔도 잔디’ 정신은 스러지지 않았다. 고부가가치 섬유 개발에 집중한 결과 국내 아크릴 원사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견실해졌다. ‘코로나 쇼크’가 닥친 올 2월엔 항균 기능을 추가한 마스크용 부직포의 국내 최대 생산업체로 우뚝 섰다.
섬유산업이 전체 수출액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1970년대, 김해와 수원 대구 공장에도 실업여고를 세워 산업 역군을 길러냈던 한일합섬. 구로공단 여공들과 함께 수출 최전선에서 밤낮없이 땀 흘리던 그 여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동안 회사를 거쳐 간 직원만 30여만 명. 외환위기 때 해체된 여자실업배구단의 최고 공격수 김남순과 세터 이수정도 이젠 추억 속의 스타가 됐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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