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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는 1988년에 지은 2층 규모의 현대식 교회가 붙어 있다. 벽돌로 지은 신식 교회의 십자가와 112년 된 종탑의 십자가가 한옥 예배당을 보듬고 있는 모습이다. 요즘은 코로나 여파로 평일에 한옥 문을 닫고 가끔 주일학교 등으로만 활용한다.
장관 자리 거부한 '3선 총회장'
이곳은 원래 ‘김제 갑부’ 조덕삼(趙德三·1867~1919)의 과수원 땅이었다. 조덕삼의 할아버지는 평양에서 중국과의 무역으로 부를 쌓았고, 아버지는 김제에서 금광업으로 큰 부자가 됐다. 그 덕분에 김제평야의 비옥한 땅을 많이 가졌다. 조덕삼의 집은 김제와 전주 정읍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여서 마방(馬房)도 크게 운영했다.
1896년 어느 날, 초라한 행색의 17세 소년이 이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는 경남 남해 태생으로 6세 때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딱한 사연을 들은 조덕삼은 그를 머슴으로 들이고 마부 일을 맡겼다. 오갈 데 없는 ‘고아 머슴’은 남다른 눈썰미로 일을 잘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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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 선교사가 이 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묵어가게 됐다. 조덕삼은 가난한 조선 땅에 자청해서 선교사로 들어온 테이트의 헌신적인 신앙에 감명받아 사랑채를 예배 장소로 제공했다. 곧이어 아내, 머슴 이자익, 같은 동네 사람들과 예배에 동참했다. 얼마 뒤에는 이자익과 동시에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됐다.
1908년에는 돈과 땅을 내놓아 교회당을 지었다. 교세가 커지자 장로를 선출해야 했다. 자연스레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천거됐다. 누가 봐도 결과가 뻔한 투표였다. 조덕삼은 교회 건립의 중추이자 대지주이고, 나이도 열두 살이나 많았다. 이자익은 먼 경상도 출신의 미천한 마부였다.
그런데 웬걸, 뚜껑을 열고 보니 이자익이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일순 장내가 술렁였다. 당시 서울에서는 백정과 갖바치가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들이 별도 교회를 설립해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조덕삼이 일어나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는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더욱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수가 터졌다.
이후 조덕삼은 ‘머슴 장로’를 지극하게 섬겼고 그의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2년 뒤 장로가 되자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며 학비와 생활비 일체를 지원했다. 이자익이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금산교회 목사로 청빙해 깍듯이 모셨다.
그는 이자익 목사를 도와 유광학교(동광학교의 전신)를 세우고 일제의 압박에 맞서며 한글과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태극기도 만들었다. 3·1운동 때 그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그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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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아름다운 인연은 대를 이어 전해졌다. 이자익 목사의 아들인 이성환 장로, 손자인 이규완 장로(전 옌볜과학기술대 교수)와 이규석 목사, 조덕삼 장로의 아들 조영호 장로와 손자 조세형 장로(4선 국회의원), 증손자 조성훈 장로가 4대째 연을 맺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ㄱ’자 교회는 소중한 문화재가 됐다.
새 국회 '진정한 머슴' 되새기길
금산교회 한옥 예배당에는 강단 뒤쪽으로 목사들이 드나들던 쪽문이 있다. 목회자들은 이 문으로 몸을 숙이고 드나들며 겸손을 새겼다. 오는 30일은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함께 세례를 받은 기념일이다. 이날 여의도에서는 새 국회가 개원한다.
선거 운동 때 허리를 굽히며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외치던 국회의원들은 임기를 시작하기 전에 ‘진정한 머슴’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겨보기 바란다. 신분과 나이, 지역 차이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그 열쇠가 들어 있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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