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3일 아침 강원 철원 비무장지대(DMZ) 내 한국군 감시초소(GP)를 향해 수차례 총격을 가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일 만에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하루 만이다.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교착 국면을 타개할 대안으로 내세웠던 ‘자력갱생’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워지자 군사 도발을 통한 ‘벼랑 끝 전술’로 전략을 전환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합참 “의도성 확인해야”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오늘 오전 7시41분께 중부 전선 GP에 북측에서 발사된 총탄 수발이 피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며 “우리 군은 대응 매뉴얼에 따라 현장 지휘관 판단하에 경고 방송 및 사격 2회를 했다”고 밝혔다.
합참에 따르면 한국군 GP 외벽에서 총 4발의 적 탄흔이 발견됐고,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10여 발씩 두 차례 대응 사격을 했다. 이후엔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는 취지의 경고 방송을 했다. 남측 인원과 장비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합참은 고의적 도발은 아닐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북한 의도를 확인하고 있다. 북측 근무 교대 과정에서 오발이 일어났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총알에 맞은 GP의 탄흔을 초기 분석한 결과 유효 사거리 내에서 화기가 발사된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군 관계자는 “당시 안개가 짙게 끼어 시계가 1㎞ 이내로 제한됐고, 시간대가 보통 근무 교대 이후 화기나 장비 점검이 이뤄지는 시간대였다”며 “북측 GP 근처의 영농지역이나 북한군에도 특이 동향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보통 도발을 계획한다면 시간, 장소, 기상 등을 모두 고려하는데 시계가 좋지 않고, 거리도 멀어 부적절한 데다 우리 측 GP가 북한 측 GP보다 높은 지형에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총격 도발은 9·19 남북 군사합의 위반이다. 남북은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이 되는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2018년 합의했다. 심지어 이번 총격 도발이 가해진 지역은 9·19 군사합의에 따라 남북이 공동으로 유해 발굴 사업을 하기로 한 화살머리고지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전날엔 김정은 건재 과시
이번 총격 도발은 김정은이 20일간의 잠행을 마치고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 하루 만에 이뤄졌다. 전날 조선중앙방송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관영매체들은 김정은이 노동절이었던 지난 1일 평안남도 순천 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TV는 김정은이 걸어 다니거나 서서 대화하는 장면, 인파 환호에 손을 흔드는 장면, 담배를 피우는 모습 등을 영상으로 공개했다. 그러나 북한 매체들은 그간 잠행과 관련된 설명은 언급하지 않았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김정은의 건강 이상설과 관련, “김 위원장의 걸음걸이가 달라졌다는 이유 등을 들며 수술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도가 있었다”며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가벼운 시술도 받지 않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김정은이 공개 행보에 나선 것은 지난달 11일 평양의 노동당 중앙위 본부청사에서 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한 이후 처음이다. 그가 집권한 이후 처음으로 지난달 15일 김일성 주석 생일(태양절)에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지 않으면서 신변이상설이 불거졌었다.
北, 미·북 대화 안 풀려 초조했나
일각에서는 김정은의 잠행과 더불어 이날 벌어진 총격 도발 모두 북한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적 행보라는 분석이 나온다. 비핵화를 둘러싼 미·북 대화의 동력이 식어가는 상황에서 한·미를 비롯한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초부터 11월 재선 준비에 들어가면서 북한 이슈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 상황에서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제적 ‘자력갱생’이 어려워지자 조급함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지난달 한·미가 그간 미·북 대화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연기했던 연합공중훈련을 하고 최근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미국 전략폭격기 ‘B-1B 랜서’가 한반도 인근 상공을 비행하는 등 자신들에게 군사적 ‘위협’이 증가한 것도 북한이 행동에 나선 배경 중 하나로 거론된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 진전이 없자 북한이 초조함을 느꼈을 것”이라며 “북한이 벼랑 끝 전술로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앞으로도 수위를 높여가며 도발에 나설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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