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에 사는 직장인 A씨는 지난달 동네 슈퍼마켓에서 담배 13보루를 구입했다. A씨가 느닷없는 ‘담배 사재기’에 나선 건 경기도와 과천에서 받은 재난지원금 60만원(3인 가족 기준)을 쓰기 위해서다. 그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면 대형 마트보다 비싼 값을 줘야 하는데, 담배는 가격이 동일하다”이라며 “대형마트에서는 재난지원금을 사용할 수 없어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울산에서 직장을 다니는 B씨도 지난달 회사가 준 지역사랑상품권 20만원으로 담배 4보루를 샀다고 했다. B씨는 “전통시장에서 달리 살만한 게 있느냐”고 되물었다.
각 지자체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타격을 극복하기 위해 지급한 재난지원금이 담배 사재기 용도로 변질되고 있다. 정부가 2400억원을 들여 할인율을 높인 지역사랑상품권도 담배 구입에 주로 쓰이긴 마찬가지다. 이 탓에 지난 3월 담배 판매량은 전년 동월 대비 28.1% 급증했다. 재난지원금을 대형 마트에서 사용할 수 없게 하면서도 구입 품목은 제한하지 않은 결과다.
◆지원금으로 담배 구입…“품귀현상 벌어질 정도”
5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3월 담배 판매량은 2억8740만갑으로 집계됐다. 하루 1000만 갑 가까이 팔린 셈이다. 지난달(2억4230만갑)은 물론 전년 동월(2억5520만갑)에 비해서도 10% 넘게 늘었다. 2016년(3억170만갑) 이후 매년 담배 소비가 지속적으로 줄어든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현상이다.
지난 3월부터 갑자기 담배 판매량이 급증한 건 같은 달 정부가 2400억원을 들여 지역사랑상품권 할인율을 5% 안팎에서 10%로 높였기 때문이다. 할인율을 높인다는 건 그만큼 정부 돈을 시중에 더 푼다는 얘기다. 통화량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되, 대형마트에서는 쓰지 못하게 해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지역 소상공인을 돕자는 취지다. 기업들도 같은 취지에서 급여 일부를 지역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하고 사용을 독려했다. 이런 기조에 힘입어 지난 3월 지역사랑상품권 판매액은 7208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월 평균 판매액(2651억원)의 세 배에 달하는 숫자다.
소비자들이 이 돈을 하필 담배에 쓰는 이유는 이렇다. 지역사랑상품권은 백화점, 대형마트, 복합쇼핑몰 등에서 쓸 수 없다. 하지만 동네 가게에서는 대형마트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값에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 찾는 상품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여기에 재난지원금의 사용 기한까지 고려해야 한다. 신선 식품 등을 대량으로 샀다가 유통기한이 지나 버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다. ‘대형마트와 동네 가게에서 동일한 가격에 살 수 있고, 보존성이 좋은 상품’, 바로 담배다.
4월부터 경기도 등 지자체들이 지역화폐 등으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담배 사재기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자체 대부분은 지원금을 대형 마트에서 쓰지 못하게 하면서도 품목 제한은 따로 두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지역 슈퍼마켓에서는 담배 품귀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담배업계 관계자는 “지난달 판매량 통계는 이 달 말 공식 발표된다”면서도 “재난지원금을 주는 지자체가 늘어난 4월 이후부터는 담배 판매량이 훨씬 가파르게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왜 대형마트에선 못 쓰게 했는지 이해 안돼”
이런 현상은 이달부터 중앙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코로나지원금) 지급이 본격화되면서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코로나지원금 역시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 사용할 수 없어서다. 온라인 결제도 불가능하다.
이처럼 코로나19 관련 정부 지원금 중 상당액이 담배 구입에 사용되면서 소상공인을 돕는다는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담배 세금은 판매금액의 73.8%, 원가를 제외한 마진율은 9.3%에 불과하다. 4500원짜리 담배 한 갑을 팔면 고작 418원이 남는 셈이다. 담배 판매가 늘어 매출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카드수수료율이 높아지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점주 손에 들어오는 돈은 더 적어진다.
정부와 지자체가 소상공인을 위한다며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만 지원금 사용처에서 제외한 게 패착이었다는 지적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난지원금을 아예 현금으로 지급해 경기 부양 효과를 극대화하거나, 구입 가능 품목을 몇몇 생필품으로 제한해 오용을 막는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택했어야 한다”며 “특정 업종에서만 사용을 제한하면서 이도저도 아닌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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