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수위가 높네요. 정말 다 내려놓은 것 같습니다.”
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를 지켜본 한 경제계 관계자의 얘기다. ‘무노조 경영’을 폐기한다는 메시지가 나올 것은 짐작했지만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 “나와 관련된 재판이 끝나도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계속 활동할 것”과 같은 발언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직접 마이크를 잡고 국민 앞에 머리를 숙인 점, 준법감시위가 제시한 시한보다 닷새 먼저 대국민 사과에 나선 점 등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번 대국민 사과의 수위는 이 부회장이 직접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원론적인 수준의 사과만으로는 국민을 납득시키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메르스 때도 국민 앞에 머리 숙여
2014년부터 삼성그룹을 이끌어 온 이 부회장은 위기 때마다 자신의 것을 하나씩 내려놨다. 총수가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삼성그룹이란 글로벌 기업을 이끌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삼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한국을 강타한 2015년 6월에도 그는 대국민 사과를 했다.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사태의 2차 진원지로 지목된 데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이 부회장은 “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해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쳤다”며 “환자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치료하겠다”고 말했다. 삼성그룹 내에선 송재훈 병원장이 나서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 부회장은 직접 국민 앞에 머리를 숙이는 길을 택했다.
이 부회장은 사과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삼성서울병원의 혁신 방안을 함께 제시했다. 당시 그는 “혁신 응급실을 포함한 진료 환경을 개선하고 부족했던 음압병실도 충분히 갖추겠다”며 “감염질환에 대처하기 위해 예방활동을 벌이고 백신과 치료제 개발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엔지니어링을 살린 사재 출연 반응
2015년 삼성엔지니어링 유상증자 공모도 이 부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당시 삼성엔지니어링은 2015년 3분기 영업손실 1조5127억원을 기록하며 자본잠식에 빠진 상태였다. 유상증자와 함께 본사 사옥 매각도 추진하고 있었다. 시장의 소문은 흉흉했다. 삼성그룹이 삼성엔지니어링 꼬리 자르기에 나설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상황이 녹록지 않다고 판단한 이 부회장은 사재 출연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는 3000억원을 투입해 일반 투자자들과 똑같이 유상증자 공모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유상증자 실패를 막기 위해 오너가 책임경영을 실천한다는 차원이었다. 당시 삼성그룹은 “삼성엔지니어링의 유상증자는 자본잠식 상태를 해소하고 상장폐지를 막기 위해 반드시 성공적으로 완료돼야 하지만 대규모 증자로 기존 주주들의 미청약 발생 우려가 있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이 유상증자 공모에 참여한다는 발표는 시장에 긍정적인 신호를 줬다. 투자자들은 이 발언을 삼성그룹이 삼성엔지니어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일반 투자자들이 앞다퉈 공모에 참여했던 배경이다. 유상증자 공모는 성공적이었다. 우리사주조합 청약이 100% 완료된 데 이어 구주주 청약에서도 99.9% 청약이 이뤄졌다. 이때 모인 자금은 1조2651억원에 이른다.
2016년 9월 삼성전자가 갤럭시노트7을 리콜하기로 한 것에도 이 부회장의 결단이 있었다는 말이 나왔다. 당시 삼성전자는 온라인에서 배터리 발화 문제가 제기된 지 9일 만에 갤럭시노트7 판매분과 재고 총 250만 대를 전량 리콜했다. 당시 삼성에선 소비자 편익과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이 부회장이 ‘비용에 관계없이 전량 회수하라’는 최종 지시를 내렸다는 얘기가 나왔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자신의 기득권을 하나둘씩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며 “그의 행보가 삼성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송형석/황정수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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