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이 지난달에만 6000억원이 넘는 회사채 인수를 맡으며 대형 증권사들을 제치고 이 부문 2위로 급부상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얼어붙은 회사채시장을 회복시키기 위해 지원사격에 나선 결과다. 투자심리가 단숨에 회복되기 어려운 상황임을 고려하면 당분간 산은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이례적인 현상이 지속될 전망이다.
5일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 전문매체 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지난달 총 9건, 6500억원어치 일반 회사채 인수를 맡으며 KB증권(19건, 6920억원)에 이어 이 부문 2위에 올랐다. 2012년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가 도입된 이후 월별 기준으로 최대기록을 새로 썼다. 종전 최대실적은 2012년 1월 기록한 3829억원(7건)이다.
연간 실적으로 봐도 산은의 회사채 인수규모가 지난달보다 컸던 시기는 2012년(2조433억원)과 2013년(1조5076억원), 2014년(8193억원)뿐이다. 4월 한 달간 인수규모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누적 인수금액(6635억원)과 비슷할 정도로 최근 회사채 인수업무가 급증하고 있다.
산은이 국내 회사채 발행시장에서 눈에 띌만한 실적을 내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산은은 그동안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회사채 발행 주관이나 인수를 맡지 않았다. 국책은행이 탄탄한 기업들의 채권 발행에도 참여하면 일반 증권사들의 먹거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서다. 이런 이유로 산은은 최근 몇 년간 자력으로 자금조달이 힘든 저신용 기업들의 채권 주관과 인수 정도만 맡아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오랫동안 지켜온 원칙이 깨졌다. 자력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운 기업들이 늘면서 산은이 회사채 발행시장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산은은 지난달부터 정부의 금융시장 안정화방안 중 하나인 회사채 인수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이 제도는 신용등급이 ‘A’ 이상인 기업이 공모 회사채를 갚기 위해 새 회사채를 발행할 때 산은이 인수단으로 참여해주는 지원 방안이다. 투자수요가 목표금액에 미달하더라도 산은이 발행금액의 40% 한도 내에서 팔리지 않은 물량을 매입하기로 약속돼있다. 발행 예정금액이 1000억원인데 수요예측(사전 청약)에 들어온 매수주문이 400억원이면, 안 팔린 600억원어치 중 최대 400억원어치를 산은이 직접 인수해주는 식이다. 산은은 지난달 이 제도를 활용해 기아차 롯데쇼핑 롯데칠성 호텔신라 등의 회사채 발행에 인수단으로 참여했다. 이 달엔 대표 주관사로서 한일홀딩스 회사채 발행을 지원하기로 했다.
산은은 회사채 인수 프로그램과 별개로 직접 수요예측에 참여해 회사채를 사들이는 지원도 병행하고 있다. 이 같은 지원 사격에 힘입어 대한제당 동아쏘시오홀딩스 롯데푸드 풍산 하나에프앤아이 등이 미매각 사태를 피하고 회사채 발행을 성사시켰다. 채권 발행과정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투자자로서도 지원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산은이 회사채 시장에서 눈에 띌 정도로 기업들의 자금 조달여건이 악화되고 있는 것”이라며 “적잖은 기업이 정부 지원 없이는 유동성 확보가 어려운 상황을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추가 지원방안이 속속 시행을 앞두고 있음을 고려하면 당분간 회사채시장에서 산은이 두각을 보이는 현상이 지속될 전망이다. 산은은 이달부터 신용등급 ‘A’ 이하 기업을 상대로 한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시행할 방침이다. 회사채 신속인수제는 기업이 만기를 앞둔 채권 상환을 위해 새 채권을 사모로 발행하면 조달금액의 80%를 산은이 인수해주는 제도다. 산은이 사들인 회사채는 신용보증기금의 지급보증을 통해 신용등급을 높여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으로 다시 발행된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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