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텍사스산 원유(WTI) ‘6월 인도분’ 가격이 지난 18일 두 달만에 배럴당 30달러를 회복했습니다. 거래 만기를 불과 하루 앞둔 상황이지만, 한 달 전 시장을 충격에 빠뜨렸던 5월물처럼 ‘마이너스 가격’을 다시 볼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직전 최근월물이었던 WTI 5월물은 만기를 하루 앞둔 지난 달 20일 배럴당 -37달러대까지 떨어졌습니다. 비록 거래량이 많지 않았고 원유 관련 ETF(상장지수펀드)의 운용상 문제 등이 얽혀 있었지만, 난생 처음 보는 마이너스 유가에 대다수 투자자들이 경악했죠.
태풍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일이지만, 전염병의 대유행으로 투자심리가 취약한 때 닥친 초유의 상황은 과도한 공포를 자극했습니다. 많은 외신들이 “넘치는 원유를 저장해둘 시설이 없다. 6월물도 마이너스 전환이 가능하다”며 이례적인 상황을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물처럼 과대 포장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돈을 받고 원유를 갖다쓰는 시대’가 금방 현실로 다가올 것만 같은 착각을 퍼뜨리는 과정이었습니다.
‘마이너스 유가 시대’라는 환영(幻影)은 많은 보수적인 투자자들의 손실 만회 기회를 빼앗아 가기도 했습니다. 삼성자산운용 등 국내외 원유 ETF 운용회사들은 ‘위험 회피’를 이유로 최근월물 투자 비중을 전격적으로 낮췄습니다. 동시에 더 늦은 만기물로 자산을 분산했습니다.
반대로 ‘강심장’을 지닌 일부 투자자는 절호의 수익 기회로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난 14일 블룸버그통신이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런던 소재의 한 중견 트레이딩업체인 BB에너지는 지난달 20일 25만배럴을 마이너스 가격으로 매수했습니다. 더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막대한 수익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처음 맞닥뜨린 상황이 과도한 공포로 옮겨붙는 일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많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2009년 2월 우리은행의 후순위채 조기상환권(콜옵션 행사) 포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은행은 새로 달러 채권을 발행할 때 지급해야 하는 이자비용이 치솟자 기존에 발행한 4억달러의 채권을 조기상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요. 그전까지 조기상환권을 의무처럼 행사해왔기 때문에 원리금 회수를 기다리던 투자자들에겐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투자자들은 우리은행의 이례적인 결정 배경에 의문을 품었고, 결국엔 ‘국내 은행권의 달러 부족’이라는 실체와 다른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은행들이 충분한 달러를 보유하지 못해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확대 해석한 것이죠.
이 사건은 국내 은행주가 금융위기 이후 두 번째 바닥을 찍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신한금융지주는 2009년 3월 초에 2만원 수준으로 떨어졌다가 연말에 두 배를 웃도는 4만3000원대로 상승했습니다. 같은 기간 기업은행도 4000원대에서 1만3000원원대로 반등했습니다.
이후 은행주는 당시 가격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마이너스 원유 역시 아마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다시 경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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