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시장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A급(A-~A+) 신용도인 현대건설기계와 메리츠금융지주의 채권이 잇달아 ‘완판’에 실패했다. 정부의 지원으로 신용등급 ‘AA-’ 이상인 우량 회사채 투자심리는 다소 개선됐지만, 이보다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은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는 평가다.
2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현대건설기계가 15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위해 이날 기관투자가들을 상대로 진행한 수요예측(사전 청약)에 50억원의 매수주문만 들어오는 데 그쳤다. 500억원어치를 모집한 2년물에만 모인 수요다. 1000억원어치 발행을 계획한 3년물을 사려는 투자자는 한 곳도 없었다. 이 회사는 이번 채권을 시가평가보다 최고 1%포인트 높은 금리로 발행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음에도 기관투자가들은 눈길을 끌지 못했다. 현대건설기계의 신용등급은 10개 투자적격등급 중 일곱 번째인 ‘A-’다.
이번에 팔리지 않은 채권물량 중 약 600억원은 산업은행이, 나머지 850억원은 발행 주관을 맡은 증권사들이 나눠서 인수하기로 했다. 산은은 지난달 회사채 인수 프로그램을 가동한 지 한 달 여만에 처음으로 지원 기업에 직접에 자금을 투입하게 됐다. 그동안 이 프로그램을 적용했던 기업들은 모두 회사채 투자수요 확보에 성공했다.
이 회사보다 하루 전 영구채(신종자본증권) 투자자 모집에 나섰던 메리츠금융지주도 투자수요를 모으는 데 실패했다. 700억원을 모집한 수요예측에 110억원만 들어왔다. 이 회사는 희망금리를 연 3.5~4.2%로 제시했음에도 투자자들의 관심을 잡지 못했다. 해당 영구채의 신용등급은 현대건설기계보다 두 단계 높은 ‘A+’다.
정부 지원으로 회사채시장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면서 큰 고비는 넘겼지만 여전히 A급 이하 발행시장 분위기는 싸늘하다는 평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대유행(팬데믹) 국면으로 치달은 지난 3월 이후 회사채 발행에 나선 A급 이하 기업 대부분이 2대1에도 못 미치는 청약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다. 투자심리가 얼어붙은 핵심 원인인 코로나19로 인한 기업 실적 악화추세가 지속되고 있어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영업이익은 19조477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1.2% 줄었다. 2분기에는 더욱 나빠진 실적을 기록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미매각 사태가 잇따르자 자금 조달을 준비하던 A급 이하 기업들이 다시 움츠려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채권시장에선 당장 22일 수요예측을 앞둔 국도화학과 한화건설이 얼마나 투자수요를 모을지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보령제약, 포스코기술투자,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케피코, GS E&R 등이 회사채 발행을 준비 중이다.
IB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대규모 지원을 쏟아내면서 심각한 경색국면으로 가는 것은 막았지만 A급 이하 회사채 투자심리까지 단숨에 개선되긴 쉽지 않다”며 “실적 개선과 함께 기업들의 신용위험 확대 추세가 멈춰야 분위기가 차츰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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