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형 은행의 프라이빗뱅킹(PB)센터를 이용하는 10억원 이상 고액 자산가가 1년 새 최대 2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맡긴 자산도 은행마다 1조원 이상 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시장에 불확실성이 급속도로 커지자 자산가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7월부터 중과세되는 다주택자 양도소득세를 피해 집을 판 자산가들도 대거 은행 PB센터를 찾고 있다.
24일 은행권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기준 신한·국민·우리·하나은행의 10억원 이상(수탁 자산 기준) 고액 자산가 수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7~20% 늘었다. 이들 자산가가 맡긴 돈도 같은 기간 각각 9~15% 증가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구체적인 수치를 밝힐 순 없지만 고액 자산가 수탁 자산은 은행마다 1조원 이상 늘어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파생결합펀드(DLF)·라임 등 잇단 은행 상품 손실 사고와 유례없는 저금리 기조에도 은행을 찾는 자산가가 늘어난 것은 지금은 ‘지키는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는 전략에서 비롯됐다.
서울 강남의 한 PB센터 관계자는 “대부분 고객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변동성을 감수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자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자산가는 DLF 등의 파생상품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초단기 정기예금과 외화예금, 골드바 등 안전자산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다. 채권형 펀드와 절세 효과가 높은 저축성 보험 가입도 증가하는 추세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슈퍼 리치 "안전 제일"…단기예금 늘리고 저축성 보험으로 稅테크
지난해 대형 은행들의 프라이빗뱅킹(PB)센터는 고액 자산가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해외 금리 파생결합펀드(DLF)와 라임펀드 사태 등으로 대규모 손실을 안겨주면서다. 반전의 계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었다. 시장에 불확실성이 급속도로 커지자 자산가들은 어쩔 수 없이 은행의 PB센터로 다시 발길을 돌려 투자 해법을 찾아 나섰다. 투자 접근법은 완전히 바뀌었다. 공격적인 투자는 자취를 감췄고 수시입출금식 예금과 만기가 짧은 정기예금 등에 돈을 몰아넣었다. 세제 혜택을 볼 수 있는 저축성 보험에도 관심이 높았다. 한 시중은행의 PB센터장은 “고수익 고위험 상품을 문의하는 자산가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안전 투자를 강조하고 있다”며 “저금리 시대인데도 목표 수익률을 예금 금리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서 결정하면서 ‘지키는 투자’에 매진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제로금리’에도 예금 선호 여전
24일 은행 PB업계에 따르면 정기예금 비중을 늘리는 자산가들이 크게 늘고 있다. 정기예금 금리(1년 만기)가 연 0%대로 떨어졌는데도 돈을 더 맡기려는 분위기가 나타나는 것에 대해 PB들은 이례적이라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리가 떨어지자 ‘개미 투자자’들은 예금을 깨서 증시로 향했지만 자산가들은 정기예금 비중을 오히려 늘린 경우가 많았다”며 “금리 하락에도 개인 예금 전체 규모가 늘어난 데는 자산가들의 이런 움직임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신한 국민 하나 우리 등 4대 은행의 3월 말 정기예금(개인 부문) 잔액은 167조4233억원으로 전달보다 1187억원(0.1%) 늘었고 지난달 말에는 4049억원(0.2%)이 더 불었다.
자산가들은 정기예금으로 돈을 맡길 때 만기를 1~6개월짜리 등으로 짧게 설정하고 있다. 이자 수익을 크게 기대하기 어렵지만 ‘안개’가 걷히면 언제든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이유에서다.
달러 투자 비중도 포트폴리오 관리 차원에서 꾸준히 늘리고 있다. 금리는 원화예금보다 더 낮지만 환율 리스크를 줄여보겠다는 전략이다. 자산가들은 달러예금에서도 언제든지 출금이 가능한 수시입출금 예금을 선호하고 있다는 게 일선 PB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지난 4월 말 4대 은행의 수시입출금식 외화 보통예금(개인)은 281억6800만달러로 2월 말(216억1500만달러)에 비해 두 달 새 30% 늘었지만 만기를 정해둔 외화 정기예금은 같은 기간 5% 느는 데 그쳤다.
“재테크 안되면 세테크라도”
자산가들은 방카슈랑스(은행에서 판매하는 보험) 가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4대 은행의 방카슈랑스 가입액(월납)은 올 들어 4월까지 883억원으로 전년 동기(698억원) 대비 26.5% 늘었다. 이상화 국민은행 WM투자전략부장은 “자산가들이 방카슈랑스를 통해 구입하는 보험 상품은 대부분 비과세 혜택을 볼 수 있는 저축성”이라며 “수익률은 은행 예금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대부분 10년 이상 유지해야 세금을 줄일 수 있지만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안전자산 비중을 늘리자는 차원에서 상품을 소개해달라는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저축성 보험은 월납은 매월 150만원, 일시납은 1억원까지 이자소득세(수익금의 14%) 비과세가 된다.
PB업계에서는 자산가들이 은행으로 향하게 된 이유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부동산과 증권시장의 방향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양도소득세 중과를 피하기 위해 주택을 처분했지만 마땅히 돈을 굴리기도 어려워졌다. 서울 강남권의 한 PB는 “지난해 정부가 12·16 대책을 통해 서울 25개 구 등 모두 44개 조정대상지역에서 10년 이상 장기보유한 주택을 다주택자가 올해 6월까지 처분하면 양도소득세 중과를 피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 집을 판 자산가들이 많았다”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다시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고 일단 PB센터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주택자가 7월 이후에 집을 팔면 양도소득세율이 최고 세율(42%)에 10~20%포인트 더해져 결정된다. 주식시장 역시 코로나19로 인한 ‘2차 쇼크’ 우려가 남아 있어 자산가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다는 게 은행권의 설명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 일부 자산가들이 공격적으로 ‘몰빵’식 투자에 나서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한두 달 전에 나타난 극단적인 위험 회피 분위기는 상당히 가라앉았지만 안전자산 위주의 분산 투자는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정소람/김대훈/송영찬 기자 ra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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