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빗장 푸는 PIGS

입력 2020-05-24 17:43   수정 2020-10-09 15:40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유럽 각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국경 개방’이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2차 대유행’ 우려가 여전하지만 최대 수입원인 관광산업을 서둘러 재개하지 않으면 경제가 파탄 날 우려가 있다는 절박감에서다.

2010년 재정위기를 겪었던 이른바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로 불리는 4개국이 가장 먼저 국경 개방에 나선다. 이들 국가는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고 국가부채비율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100~170% 이르는 등 재정이 취약하다. 이탈리아는 다음달 3일부터 유럽 국가를 대상으로 국경을 다시 열기로 했다. 그리스는 다음달 15일부터 외국인 관광객 입국을 허용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도 23일(현지시간) 공식 성명을 통해 오는 7월부터 관광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유럽에선 지금도 매일 수천 명의 신규 확진자와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PIGS 국가들이 국경 개방을 선택한 건 봉쇄조치가 계속되면 실업률 급증과 세수 감소 등으로 국가경제가 파탄 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그리스의 GDP 대비 관광산업 기여도는 20.8%에 달한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관광으로 먹고사는 PIGS 직격탄…"성수기 빗장 안풀면 국가부도"

“관광을 재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다시 일어설 수 없다.”(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 “전염병 재유행 우려가 있지만 우리는 관광산업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유럽 관광대국 지도자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여전한데도 조기 국경 개방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내놓은 발언이다. 이른바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로 불리는 남부유럽 관광대국들은 관광산업 재개야말로 국가 경제의 존립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 각국의 국경 개방에 한스 클루게 세계보건기구(WHO) 유럽담당 국장은 최근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재유행이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사람들은 봉쇄령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축하가 아니라 준비를 해야 할 때”라며 방역을 강조했다.


경제성장률 추락하는 PIGS

관광은 유럽연합(EU)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이다. EU 회원국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12%가 관광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지난해 세계 여행객의 절반 이상은 유럽을 찾았다. 특히 6~8월은 유럽 관광의 성수기다. PIGS 국가들이 다음달 국경 개방을 서두르는 이유다.

세계관광기구에 따르면 지난 3월 유럽을 찾은 관광객 수는 전년 동기 대비 60% 이상 급감했다. 각국의 봉쇄조치가 3월 중순부터 시행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감소폭은 2분기에 더욱 커질 전망이다. EU는 코로나19 여파로 역내 관광산업 일자리의 절반이 넘는 640만 개가 사라질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은 PIGS 등 남부유럽 국가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내놓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에서 그리스가 -10.1%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조사 대상 194개국 중 185번째로 낮은 수치다. 이어 이탈리아(-9.1%·183위), 스페인·포르투갈(각 -8.0%·171위) 순으로 평가됐다. PIGS 국가 경제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란 분석이다.

국가부도 위험까지 급상승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관광산업 비중은 직접기여도와 전체기여도로 구분된다. 직접기여도는 관광객이 해당 국가에서 지출한 직접비용이다. 전체기여도는 고용 효과 등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그리스의 지난해 GDP 대비 관광산업의 직접기여도는 6% 수준이었지만 고용 효과를 감안한 전체기여도는 20.8%였다. 관광산업이 다른 업종에 비해 고용유발 효과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사자 대부분이 서민층이다. PIGS 국가들이 관광산업을 살리는 데 목을 매는 이유다. ‘남부유럽 국가들에 관광산업은 중동의 석유와 마찬가지’(로이터통신)라는 분석도 있다.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PIGS 국가들의 국가부도 위험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23일(현지시간) 기준 그리스의 국채 5년물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241.9bp(1bp=0.01%포인트)를 기록했다. 6개월 전에 비해 59.2bp 급등했다. CDS 프리미엄이 상승했다는 것은 투자자가 부도 위험을 그만큼 높게 본다는 의미다. 이어 △이탈리아(212.5bp) △스페인(99.8bp) △포르투갈(96.8bp) 순이었다. 유럽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최하위권이다.

제2 유럽 재정위기 불러오나

유럽 국가들이 관광산업 재개를 선언했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해외 관광객이 찾아올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관광업계는 2023년께나 돼야 관광 수요가 코로나19 직전 수준을 회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PIGS 국가들이 이때까지 버틸 여력이 있느냐가 관건이다. 2019년 기준 EU 27개국 중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그리스로 176.6%에 달했다. 다음으로 △이탈리아(134.8%) △포르투갈(117.7%) △스페인(95.5%) 등 순이었다. EU 권고치(60%)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이들 국가는 코로나19에 따른 경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관광산업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세수 감소→재정적자 확대·부채비율 급증→유럽 재정위기→글로벌 경기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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