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유연한' 재정준칙이라면 있으나마나 한 것 아닌가

입력 2020-06-08 18:01   수정 2020-06-09 00:14

정부가 오는 8월까지 재정수지와 국가채무 등을 관리하기 위한 재정준칙을 마련키로 했다. 내년 예산안과 2020~2065년 장기 재정전망을 국회에 제출하는 시점에 맞춰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 탓이 크기는 하지만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어 일단은 반가운 일이다. 올 들어 세 차례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5.8%)과 국가채무비율(43.5%)은 이미 역대 최고로 치솟은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적 상황을 고려한 유연한 재정준칙이 필요하다”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은 또 다른 우려를 낳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한국과 터키를 제외한 32개국이 운영하는 재정준칙은 법적 구속력을 지닌 나라살림의 엄격한 관리목표다. 유럽연합(EU)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3%, 국가채무비율 60% 이내 기준’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논의 시작단계부터 ‘유연한 재정준칙’이라고 느슨하게 설정한다면 정치권에서는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지침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커지게 된다.

정부 설명대로 경기 변동에 따라 재정으로 대응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정의 경기대응 필요성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한국만 이런 이유로 ‘재정준칙이 유연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정준칙은 지키려고 최대한 노력할 때 의미가 있다. 말이 재정준칙이지 상황에 따라 빠져나갈 수 있는 방식이 돼버리면 무분별한 지출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말 것이다.

정부가 ‘유연한 재정준칙’으로 거론하는 방식들은 그런 의구심을 더욱 키운다. 가령 ‘3년 연속 목표치를 밑돌면 안 된다’ 식의 규정은 임기가 약 2년 남은 현 정권에 재정 확대 면죄부를 줄 위험도 있다. 채무비율 자체를 제한하기보다 증가속도를 규제하는 방안도 꼼수로 비친다. 재정준칙을 법제화하는 대신 주무부처의 관리 수준으로 다루는 태도는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처럼 아예 무장해제시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효성 있는 재정준칙이 되려면 최소한 국가채무비율,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수준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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