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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은 지난 7일 트위터에 “(봉오동 전투 승리로) 독립운동가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의 희망을 갖게 됐다”는 글을 올렸다. “의병뿐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 등 평범한 백성들로 구성된 독립군의 승리였기에 겨레의 사기는 더 고양됐다”는 평가도 덧붙였다. 그런 위업을 이룬 홍 장군이 지금 묻혀 있는 곳은 이역만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이다. 그렇게 된 사연이 기막히다.
만주 간도지방의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잇달아 치욕적 패배를 당한 일본군은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화계획’이란 이름의 독립군 근거지 소탕작전에 나섰다. 한인 독립군이 다시는 만주일대에서 활동할 수 없도록 씨를 말리겠다며 1만8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그리고는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 사이에만 훈춘을 비롯한 간도지역 한인 3623명을 학살했다(독립신문). 한인촌의 가옥 3500여 채, 학교 60여 개소, 교회 20여 개소와 양곡 6만여 석까지 불태웠다. 말 그대로 ‘초토화’였다.
일본이 의도했던 대로 독립군이 더는 간도 일대에 발을 붙이기 어려워졌다. 홍 장군의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 손길이 미치지 않는 러시아의 연해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러시아(당시 소련) 정부는 중국과 달랐다. 통치자로 등극한 요시프 스탈린에게 한인 독립군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1937년 극동지역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킬 때 홍범도 장군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한겨울 혹한 속에서 17만2000여 명의 극동지역 한인(고려인)들이 무작정 옮겨지는 과정에서 4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게 다행이었다. 그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게 된 사연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런 홍 장군 유해의 봉환을 추진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늦었지만 마땅한 결정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게 있다. ‘경신참변’으로 불리는 한인 대학살 사건이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와 같은 패배가 더는 없도록 하겠다며 ‘초토화’에 나선 일본군 앞에서 독립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 등 평범한 백성들’이 허망하고 원통하게 목숨과 생활터전을 잃었다.
‘경신참변’은 한 해 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장 독립군을 군사적 기반으로 삼으려던 임시정부의 구상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사회평론가 복거일 선생은 저서 《낭만적 애국심》에서 “조선 독립군처럼 비정규전을 펴는 군대는 활동의 근거가 있어야 보급을 받고 인원을 보충할 수 있었다”며 “일본군은 당연히 그 근거를 없애려 했고 결국 만주의 조선인들이 참혹한 화를 입었다”고 진단했다. 자신들보다 몇 배나 덩치가 큰 중국과 러시아를 연달아 격파하며 무력과 국력을 팽창시키고 있던 일본 앞에서 ‘봉오동’과 ‘청산리’는 비용이 너무 컸고, 지속가능할 수도 없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100주년을 맞는 올해 우리가 기억하고 새겨야 할 역사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이유다. 일본군을 통쾌하게 쳐부순 두 전투만 놓고 보면 ‘자신감’ ‘희망’ ‘사기의 고양(高揚)’이 솟구칠지라도, 그 대가가 혹독하고 참담했음에 눈을 감아서는 곤란하다. 잠시의 ‘정신승리’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국력을 키워나가는 게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 전투를 진정으로 기리고 기념하는 것임을 새기게 된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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