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회가 250억달러(약 30조원) 규모의 초당적 반도체 산업 지원법을 추진한다. 미국 땅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연구개발(R&D)을 지원하고, 반도체 장비에 대한 세제혜택을 늘려 한국, 대만 등 아시아에 편중된 반도체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서다. 미 반도체 업계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세계 반도체 업계에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존 코닌 공화당 상원의원과 마크 워너 민주당 상원의원은 10일(현지시간) 상원에서 여야 의원들과 함께 반도체 지원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법안에 담긴 지원 규모와 관련해 “(직접)자금 지원과 세금 지원을 포함해 총 250억달러 규모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법안에는 연방정부와 주 정부가 미국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해 5년간 공장 건설에 100억달러, R&D에 120억달러, 공급망 개선에 7억5000만달러를 지원하고 반도체 제조장비 구입비의 40%에 대해 세금을 감면하는 방안이 담겼다. 미 여야는 하원에서도 곧 유사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미 의회의 이같은 움직임은 미 반도체 업계가 지난달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규모 정부 지원을 요청한데 따른 것이다. 인텔 등 미 반도체 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해외 반도체 기업들이 정부의 지원 덕분에 부당하게 이익을 누려왔다고 불만을 제기해왔다. 당시만해도 미 의회와 행정부는 이런 불만을 들은채만채했다. 특히 정부의 시장 개입에 부정적인 공화당에서 이런 경향이 더 심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미·중 갈등 심화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선 코로나19로 전 세계 공급망이 혼란을 겪자 미국에서도 탈세계화와 리쇼어링(기업의 국내 복귀) 바람이 거세졌다.
여기에 미·중 패권전쟁으로 반도체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5G(5세대) 통신망, 인공지능(AI) 등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미래 산업에서 반도체는 없어선 안될 부품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제정은 미국의 반도체 자급 의욕에 기름을 부었다. 애플, 퀄컴 등 미국의 주요 첨단기업들은 반도체 설계에 주력하고 생산은 상당부분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에 맡겨왔다. 하지만 중국이 홍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걸 보면서 대만에 반도체 생산을 과도하게 의존하는건 위험하다는 위기의식이 미국 내에서 높아졌다.
로이터통신은 “반도체 공급망 혼란을 부른 코로나19 확산과 중국의 홍콩에 대한 강화로, 워싱턴에서 첨단 반도체 제조가 대만에 집중된데 대한 경각심이 커졌다”고 전했다.
미 하원에서 반도체 산업 지원법안을 발의할 예정인 마크 맥콜 민주당 의원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중국 공산당이 반도체 공급망 전체를 지배하려하는만큼 우리가 미국에서 우리 (반도체)산업을 부흥시키는게 결정적으로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중국은 현재 국가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공격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대규모 반도체 펀드를 조성해 반도체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붇고 있다. 첨단 반도체 공장 유치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를 통해 반도체 자급률을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미국도 코로나19와 미·중 패권경쟁을 계기로 중국과 유사한 전략을 쓰는 쪽으로 선회했다고 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한국, 대만 등 아시아에 대한 반도체 의존을 줄이기 위해 반도체 자급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달엔 TSMC를 압박해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TSMC는 미 애리조나주에 총 120억달러를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2021년 착공해 2024년부터 제품을 양산할 예정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삼성전자에도 텍사스 오스틴의 파운드리 공장 확장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반도체 기술의 원조이면서 기술력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능력은 전 세계의 12%에 불과하다. 미 의회가 대규모 반도체 산업 지원법을 통과시키고, 행정부가 반도체 자급 정책을 강행하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의 파워는 더 세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미·중간의 반도체 부문 경쟁이 격화되면서 상대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위협도 더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은 자국 산업을 살리기 위해 여야가 초당적으로 힘을 모으는데, 한국은 21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정부,여당이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폐지 등 기업을 옥죄는 법안을 쏟아내고 있는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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