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식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장은 11일 내년도 최저임금 수준과 관련해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없으면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비상상황에서 최저임금을 크게 올려도 일선 현장에서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완곡한 표현으로 최저임금 인상 ‘속도 조절’을 시사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첫 전원회의를 열었다. 박 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부터 ‘전시상황’ ‘전무후무’ 등의 표현을 쓰며 한국 경제가 코로나19로 비상상황에 처해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지금은 대통령도 언급했듯이 전시상황이다.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앞으로도 전무후무할 엄중한 상황”이라며 “내년 최저임금 수준은 모든 이해관계자의 지혜를 모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인상 속도 조절을 강하게 시사하는 발언도 했다. 박 위원장은 “아무리 좋은 제도와 의도가 있더라도 그것을 적기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면 효과가 발휘될 수 없다”고 했다. 최저임금 제도가 취약계층의 소득 보전이라는 좋은 의도가 있지만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의미로, 30~40%에 달하는 최저임금 미만율을 의식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미만율은 법정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고 있는 근로자 비율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최저임금 미만율은 숙박·음식업의 경우 43.1%, 5인 미만 사업장 기준으로는 36.3%에 달했다.
이날 회의는 노사 간 상견례 성격이었지만 첫날부터 공방이 이어졌다. 근로자위원 대표인 이동호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사무총장은 “코로나19 사태로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아르바이트, 플랫폼노동 종사자, 하청 비정규직 등 노동자에게 피해가 집중되고 있다”며 “저임금 노동자를 보호하는 안전망인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용자위원 대표인 류기정 경총 전무는 국내외 기관들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로 전망한 것을 거론하며 “많은 기업이 생존의 기로에 서 있고 고용 상황도 악화일로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난 3년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경영난을 겪은 중소 영세사업장과 소상공인들이 코로나19 사태로 치명타를 맞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추천 근로자위원 4명을 제외한 23명이 참석했다. 민주노총은 내부 사정과 다른 일정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한편 이날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는 민주노총이 지난해 “올해 최저임금을 시급 8590원으로 정한 것은 부당하다”며 낸 소송에 대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민주노총은 “2020년 최저임금이 법에 명시된 결정기준인 근로자 생계비, 유사 근로자 임금, 노동생산성, 소득분배율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절차적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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