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삼성맨'은 결국 중국행(行)을 포기했다.
장원기 전 삼성전자 사장(사진·66)이 중국 정보기술(IT)기업 '에스윈과기그룹' 부총경리(부회장)를 맡지 않기로 했다. 1981년부터 2019년까지 39년 간 삼성에 적을 두고 삼성전자 LCD(액정표시장치)사업부장, 중국삼성 사장 등을 역임했던 장 전 사장이 중국 기업에 경영 조언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산업계에선 '그만두는 게 옳다'는 주장과 '인생 2막을 시작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야한다'는 의견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장 전 사장은 지난 15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국행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응원과 만류가 동시에 있었고 정말 많이 고민했다"며 "결정적으로 삼성전자 후배들의 설득에 흔들렸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판단'을 했는데 여론은 '옳고 그름'의 잣대만 갖다댄다"며 "경험과 지식을 전 세계에 있는 후진들에게 물려주는 게 옳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심경을 털어놨다.
▶심경에 변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숨)더 이상 제 이야기가 언급되는 게 싫긴한데요. 중국에 안 가려고 합니다."
▶중국행을 포기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주변에서 저에 대한 응원과 만류가 동시에 있었습니다. 후배들이나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이 만류하는 것에 대해선 설득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중국 업체엔 통보하셨습니까.
"네. 저쪽(왕동성 에스윈 회장)과 의리도 신경쓰였는데, 이해하더라고요."
(왕동성 회장은 중국 1위 디스플레이 업체 BOE를 일으켜세워 '중국 LCD 대부'로 불리는 인물이다. 장 전 사장이 중국삼성 사장 시절 인연을 맺었다. 왕 회장은 장 전 사장을 '따거', 즉 '형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국기업 취업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경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과 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론은 저의 결정에 대해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더라고요.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생각'이 무슨 뜻인지요.
"은퇴하고 노년에 운동하고 옛 동료들끼리 함께 모여서 밥 먹고 옛날 이야기하는 것,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경험이나 지식을 후진(後進)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게 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필요해서 중국 기업 취업을 생각한 게 아닙니다. "
(장 전 사장은 지난 11일 저녁 기자와의 통화에서 "글로벌 원 월드(global one world)가 중요하다. 한국 기업이든 중국 기업이든 제 노하우를 전수하고 인류발전에 공헌하면 그게 가치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장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제 생각을 이해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제 생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론은 '옳다, 그르다' 중 '그르다'는 관점에서 보는 것 같더군요."
▶한국 사회에 대한 실망이 크셨을텐데요.
"제가 맞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시도를 했는데요. 아직까지 한국 사회가 개방적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기업에서 일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그냥 당분간 쉬어야죠. 책 많이 읽고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당분간 한국에서 어떤 길을 찾는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도 제 이야기가 알려지며 한국 사회에 무언가 '변화'를 줄 수 있는 단초가 된 것 같습니다."
장 전 사장과의 인터뷰는 그가 '중국행 포기'를 마음 먹은 직후인 지난 15일 두 차례 이뤄졌다. 익명 댓글에 기댄 인신 공격과 원색적인 비난 때문인지 이날 전화 통화 때 장 전 사장의 목소리는 가라 앉아 있었다. 장 전 사장은 기자와 통화에서 "참 힘들었고, 너무 많이 고민했다. 경솔했다는 생각도 든다. 더 이상 제 얘기가 이슈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놓기도했다.
지난 12일 오전 장 전 사장의 심경을 전한 기사 '[단독] 39년 삼성맨은 왜 중국기업으로 가게 됐나'가 나간 이후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사이트에 5000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지만 '장 전 사장처럼 의욕 넘치는 분들에게 일할 기회를 줘야한다', '삼성 자문역 2년 정도 하다가 집에서 계시긴 너무 괴로웠을 것이다'는 내용의 의견도 적지 않았다. 장 전 사장의 후배인 삼성전자 직원들 사이에서도 '개인의 결정인데 비난하는 게 옳은 것인가', '중국과 기술격차가 크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장 전 사장은 한국 사회에 '고민해 볼 문제'를 던졌다. 산업 현장에서 은퇴를 시작한 50~60대 한국 대기업 임원들은 장 전 사장과 같은 상황을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일하고 싶은 의지'와 '외국기업 취업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사이에서 많은 은퇴자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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