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삶의 잔무늬, 주름

입력 2020-06-17 18:22   수정 2020-06-18 00:05

중년의 후배가 탄식한다. 아침에 거울을 보면 웬 낯선 이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나. 매일 노화방지 식이요법에, 주름방지 화장품도 꼼꼼히 바르고, 별별 마사지를 다 받는데도 소용이 없단다. 그동안 들인 공과 비용이 아까워서라도 극약처방을 해야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팽팽해져서 뭐하려고? 뭐하긴, 젊어 보이고 싶은 거지. “모든 게 제철이 있는 법이야. 제때 거둘 줄 아는 것이 성숙 아니냐”며 훈수를 두는 나에게 그녀는 묵묵부답이다. 아마도 극약처방에 대한 나의 동의를 기대했을 것이다. 주름이 어때서? 주름을 왜 열등한 것, 몹쓸 것으로 인식하는가. 주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주름진 것은 아닐까. 나의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중년의 시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몰락하는 신체 부위는 단연 피부다. 늘어나고 처지고, 파이고, 얼룩이 지는 얼굴을 본다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키고자 하는 욕망이 동안과 꽃중년 열풍을 몰고 왔다. 작가 문태준은 주름은 파도 같다고 했다. 한 겹 한 겹 접히며 들어오는 바닷물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밀려오는 그 파도를 두 손으로 막을 수 없으니 우리는 웃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래야 주름도 우리를 따라올 것이라고. 맞는 말이다.

세월의 흔적이 날아가버린 몸은 몸이 아니다. 몸이란 시간과 함께 성숙하고, 무르익는 것. 얼굴은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의 모든 순간이 기록된 USB다. 인정 많고 사랑이 충만하거나, 오만하고 탐욕스럽거나 하는 삶의 양지와 음지가 모두 저장돼 있다. 그것은 보톡스로 없어지지 않는다. 후배의 극약처방은 일시적으로 주름을 펼 수는 있겠으나, 내면과 외면의 부조화로 더욱 깊어진 진짜 주름을 펼 수는 없을 것이다.

피부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주름은 다른 얘기다. 우리의 피부 속은 세포들을 뭉쳐주는 섬유질로 이뤄져 있는데, 중년이 되면서 세포를 생성하는 기능이 떨어져 섬유들이 파괴되거나 뒤죽박죽 얽힌다. 이 상태에서 피부가 경직되면 주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긴다고 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젊어지고 싶다는 것은 인생의 정점이 청춘기라 생각하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왜 청춘만인가. 중년이야말로 몸과 마음의 성숙이 완결을 이룬 ‘인생의 최고조’가 아닐까.

가는 붓으로 선을 그린 듯 곱게 뻗어나간 눈주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생 웃음을 잃지 않은 눈주름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환하게 한다. 주름은 그동안 살아온 길과 만져진 시간이 삶의 잔무늬로 완성되는 그림이다. 그러니 후배여, 삶의 잔무늬를 지우지 말자. 대신 그곳에 새겨진 단 한 번뿐이었던 순간들을 오래도록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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