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에도 이 회사가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김세용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은 신입사원 면접에 들어갈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한다. 안정적인 공기업이라는 생각에 원서를 낸 지원자들은 뜨끔해하기 일쑤다. 김 사장은 “SH공사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예비 사원들부터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 출신인 김 사장은 2018년 1월 SH공사 수장을 맡았다. 당시 SH공사는 임대 사업으로 인한 부채와 손실이 계속 쌓이고 있었다. 개발할 수 있는 서울 택지가 고갈되고 있어 매출을 늘릴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취임 일성으로 그가 혁신을 외쳤지만 SH공사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김 사장이 변화를 추진한 지 2년 반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SH공사가 수십 년간 고착된 ‘임대주택=비선호 주거지’라는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공사 최초 엔지니어 출신 CEO
김 사장은 SH공사 최초의 엔지니어 출신 최고경영자(CEO)다. 도시계획 전문으로 △잠실지구 재건축 기본구상 △수색지구 개발 기본계획 △안암동 캠퍼스타운 조성 등 굵직한 서울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취임 후 첫 회의에서 “도면을 보면서 하자”고 제안해 실무 직원들을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건축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우연히 잡지에서 고(故) 김중업 선생이 해상에 세운 건물을 보고 “나도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사회운동과 환경오염 문제 등을 경험하면서 제대로 된 도시를 만드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수십 년간 도시계획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느낀 주거복지 사업의 문제점들을 취임 직후 역점 사업으로 풀어냈다. 취임사도 직접 썼다. 핵심 키워드는 임대주택 브랜드 ‘청신호’를 비롯해 ‘스마트시티’ ‘컴팩트시티’ ‘공간복지’ 등 네 가지다. 기존 택지사업본부를 폐지하는 대신 공간복지와 스마트시티를 실현할 ‘도시공간사업본부’를 설치하고, 사장 직속으로 ‘미래전략실’도 새로 꾸렸다.
임대주택에 특화 설계를 도입하고 단지를 랜드마크급 복합건물로 설계하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그는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개념의 임대주택을 짓기로 했다. 2030년까지 서울시 총가구의 20%를 임대주택으로 채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임대주택도 지역 랜드마크가 될 수 있도록 설계에 공을 들였다. 임대주택이 들어가는 신개념 공공주택복합단지 ‘컴팩트시티’를 조성할 때 국제공모를 통해 특화된 설계를 하고, 인근 주민들로부터 건의를 받아 체육관 도서관 등 커뮤니티 시설도 넣었다. 차고지 등 기존 혐오시설은 지하화해 주거 쾌적도를 높였다. 임대주택이 들어온다는 생각에 막연한 거부감을 보이는 주민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다.
이 같은 노력으로 컴팩트시티가 오히려 지역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는 주민들까지 생겼다. 현재 서울 중랑구 ‘신내4 컴팩트시티(1000가구)’를 포함해 총 다섯 곳이 가시적인 단계에 들어갔다.
현장과 소통에서 답 찾아
청년과 신혼부부를 겨냥한 임대주택 ‘청신호’도 김 사장의 오랜 고민 끝에 탄생한 브랜드다. 청년과 신혼부부의 생활 패턴을 고려한 특화 설계에 주력했다. 외식이나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많은 1·2인 가구의 특성을 고려해 부엌을 없애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공간은 넓어지고 공사비도 절감된다. 절감한 비용은 다시 천장용 에어컨 설치나 발코니 확장 등에 투자했다.
김 사장은 청신호를 일본 자동차기업 도요타가 글로벌 시장에서 저가 이미지를 벗기 위해 만든 브랜드 ‘렉서스’에 비유한다. 그만큼 신경 써서 설계하고 지었다는 얘기다. 지난 4월 입주한 1호 청신호 단지인 서울 성북구 ‘정릉하늘마루(166가구)’는 최고 74 대 1의 청약 경쟁률을 기록했을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경직된 공기업 문화가 단시간에 변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김 사장 특유의 유연한 사고 방식과 소통 리더십에서 나왔다. 그는 실무형 CEO지만 외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잘 안다고 자만하는 순간 더 실수하기 쉽다”는 게 김 사장의 지론이다. 대외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해 시민주주단도 출범시켰다. 서울 각 자치구 내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과 국민임대주택 거주자 등으로 이뤄진 주주단은 공사 직원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문제점들을 포착해 해결방안을 제안하는 역할을 한다.
여가 시간에는 짬을 내 현장을 찾는다. 주민들과 가급적 많은 대화를 하면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단지의 모습을 구상한다. 이런 작은 노력이 모여 혁신이 이뤄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최선을 다해 할 일을 하고 결과를 기다린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김 사장이 자주 되뇌는 고사성어다.
김 사장이 온 뒤 조직문화도 한층 유연해졌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수시로 전담조직이나 태스크포스(TF)를 꾸린다. 불필요한 조직은 바로 없앤다. 업무처리 효율성이 높아지고 일처리 속도도 빨라졌다.
“살기 좋은 임대가 집값 안정 시킬 것”
서울은 1인당 스타벅스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시다. 외국에선 대부분 공공 도서관에서 하는 일들이 한국에선 주로 커피숍에서 이뤄진다. 그만큼 서울에 제대로 된 도시공간 서비스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김 사장의 생각이다. ‘공간복지’를 강조하는 이유다.
공간복지는 버려져 있는 공간을 지역주민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공간으로 바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SH공사는 오류동 등 서울 내 여섯 곳에서 오랫동안 방치돼 곰팡이가 슬어 있던 반지하 시설을 전시공간과 공유주방 등으로 꾸몄다. 임대단지 내에서도 남는 공간을 찾아 주민에게 정말 필요한 공간으로 바꾸고 있다.
그는 “사람이 건축을 하지만 건축이 사람을 만든다”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공간복지 같은 작은 변화가 임대주택에 대한 인식도 자연스럽게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임대주택이 좋아지면 장기적으로는 서울의 고질적 문제인 집값 불안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김 사장은 “서울 집값이 계속 오르는 것은 공급이 없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은 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임대주택이 더 많이 들어서면 집값 안정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 김세용 SH공사 사장
△1965년 광주 출생
△1989년 고려대 건축공학과 졸업
△1991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석사
△2006년 서울시 마스터플래너,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
△2012년 고려대 관리처장
△2013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
△2014년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원 겸직교수
△2018년~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
이유정/김진수 기자 yjle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