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리의 행정명령 한 마디면 기존의 모든 법률이 무력화 된다. 새 법률을 마음대로 만들 수도 있다. 공공안전을 위협·선동하는 정보를 유포한 행위는 총리의 판단에 따라 5년 징역형에 처하게 된다.(헝가리)
#. 정부가 통신사에 개인 위치정보를 요청한다. 자가격리를 지키는지 확인하겠다는 취지다. 주요 거리엔 경찰들이 배치돼 통신사가 놓친 부분을 감시한다. 대규모 모임 자제에 따라 의회 전체 표결이 아닌, 정당 지도부의 판단에 따라 결정이 이뤄진다.(벨기에)
소설 같지만 이 모든 게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방역을 위해 유럽 각국에 도입된 정책들이다. 전례 없는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은 더 많은 권한에 대한 정부의 참을성을 시험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를 더 세세하고 미세하게 관리할수록 전염병의 감소세는 둔화되는 양상을 나타내는 반면 방역에 소홀한 나라들은 확진 환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어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부로부터의 단속이 점차 강화될수록 '빅브라더'식 감시체계가 등장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소설 '1984' 속에서 다뤘던 정보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을 일컫는 '빅브라더'가 '공중보건'이라는 명분을 갖고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주장이다.
25일 정치권 등에 따르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유럽에서도 코로나19 사태 이후 기존 체계와 상관없이 개인과 사회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조치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 국제비영리법률센터(ICNL)에 따르면 올 들어 프라이버시를 제한하는 대책을 내놓은 국가는 28개국에 이른다. 비상사태 선포는 68개국, 표현에 영향을 미친 대책을 내놓은 국가는 34개국이다. 코로나19를 진압하겠다는 이유로 'SNS 통제법(가짜뉴스 규제법)'을 만든 터키가 좋은 예다.
코로나19는 '극우 정치인'도 살려내고 있다. 흡사 독재를 연상시키는 법안을 지난 3월 통과시킨 헝가리가 예다. 도입 이후 약 3개월 만에 종료 수준에 접어든 해당 법안의 골자는 4차례 총리직을 맡으며 10년 넘게 집권한 오르반 빅토르 총리에게 국가비상사태를 무기한 연장할 수 있는 권한과 입법권 등을 부여하는 것이다. 정부의 방역 정책에 해를 끼치고 가짜 뉴스로 여겨지는 정보를 유포했다고 총리가 판단하면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
이를 두고 유럽연합(EU)를 포함한 국제사회에서는 비난이 쇄도했다. 코로나19 방역이라는 핑계로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오르반 총리에게 줘 장기 집권의 기반을 닦으려는 시도가 아니였냐는 주장이다. 해당 법이 통과되자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회 위원장은 "비상사태 조처는 EU 조약에 정해진 기본 원리와 가치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고, 유럽의회 법치위원회 관계자인 소피 인트 펠트 의원은 "오르반 총리는 민주주의와 헝가리 법치를 말살하려는 계획을 완수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법안은 3개월의 시행 후에 폐기됐다. 다만 문제는 헝가리 정부가 향후 공공 보건상의 이유로 비상사태를 선포할 경우 가짜 뉴스 처벌 조항 등을 다시 도입할 수 있다는 등의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중앙 정부가 지방 정부 재정을 다른 지방에 사용하는 등의 핵심 내용도 폐기되지 않았다.
오르반 총리실 측은 폐지 당시에도 "코로나19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다"며 "바이러스 사태의 여파를 고려하면 부자 도시가 열악한 지방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언제든 위기 상황이 오면 다시 비슷한 대목의 법안을 부활시킬 수 있는 불씨를 남긴 셈이다. 그럼에도 코로나19 방역을 빌미로 사실상 독재 법안을 내놓은 오르반 총리에 대한 헝가리 국민들의 지지는 계속되는 모양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오르반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경제 성장에 따라 수년째 지속 상승해 최근 50%를 넘어섰다.
노르웨이는 유럽 최초로 코로나19 추적 애플리케이션(앱) '스미트스탑'을 도입했다. 사용자의 위치정보를 중앙 서버에 저장한 후 감염자와 접촉했던 것으로 확인되면 이용자에게 자동으로 경고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다. 벨기에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지만 1.8m 안에서 15분간 접촉한 이들을 중앙 서버에 기록하는 자체 추적 앱을 만들려고 했었다.
유럽 시민들의 반발은 크다. 영국 예술가들 모임 데즐 클럽은 지난해 말부터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얼굴을 덮고 런던 각지에서 침묵 걷기 행사를 하고 있다. 클럽은 행사 취지를 생체인증 기능 중 하나인 '안면인식 기술'이 △공격적인 감시에 이용되며 △데이터베이스가 올바르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규제가 부족하고 △공공장소에서 무작위로 수집되는 등 개인 프라이버시를 현격히 침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면 인식 시스템에 잡히지 않는 기괴한 페이스 페인팅으로 경각심을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세르비아에서도 '얼굴을 찍히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해 세르비아 정부가 중국 화웨이의 안면인식 CCTV 1000여대를 사들여 수도 베오그란드 전역에 설치하자 세르비아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 길거리에 나서며 이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
디지털 빅브라더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개인정보를 최대한 보호하며 방역에 나서는 나라들도 있다. 코로나19에 큰 피해를 입은 독일·이탈리아·스위스 등은 구글과 애플이 함께 준비 중인 개인정보가 저장되지 않는 코로나19 추적 앱 기술 API(응용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일정 범위 안에 위치한 사람들끼리 기기 간 결합인 '블루투스'를 이용해 각 휴대전화가 보유한 코드를 주고 받는 방식으로 코로나19 발병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으면서도 개인정보는 암호화된다. 호주, 싱가포르는 최근 이같은 방식과 유사한 코로나19 추적 앱을 도입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감시체계의 효과를 한번 맛본 권력이 종식 이후에도 이를 순순히 내려놓을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헝가리의 사례처럼 권력이 디지털 빅브라더를 지속시킬 명분은 권력 마음대로여서다. 제2의 코로나19를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든지, 공동체 안전을 해치는 또다른 위협을 막아야 한다는 식이다.
더글러스 러첸 ICNL 센터장은 "전 세계 정부가 비상 지휘권을 발동하고 있으나 나중에는 이를 포기하는 데 주저할 것"이라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지휘권은 사회의 구조에 스며들게 된다. 코로나19가 공중보건의 위기만이 아닌 사회적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배성수 한경닷컴 기자 baeba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