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마을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누구의 자녀인지, 누구의 엄마인지 서로 너무 잘 안다. 익명성을 도시의 미덕 중 하나로 생각하는 요즘 시대엔 과거의 마을이 너무 불편해 보인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옆집 사람과 승강기에서 보낸 몇 초가 어색한 것을 보면 익명의 도시에도 과거의 마을은 어느 정도 필요해 보인다. 특히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시의 익명성은 무관심과 두려움일 뿐이다.
어릴 적 마을에 대한 기억은 ‘어떤 도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돼왔다. 20년 동안 마을 반장과 금고 총무를 한 아버지와 부족한 살림에도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껏 대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공동체의 온정이 흐르는 도시를 꿈꿔왔다. ‘어떻게 하면 계획적으로 마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협동조합 주택, 공동체 주택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뜻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살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해야 마을 공동체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주택을 짓고, 살 사람들을 뽑으면 익명의 도시가 하나 더 늘어날 뿐이다.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 비슷한 생활 주기를 가진 사람들, 사회적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마을을 도시 곳곳에 조성하면 사람들 사이의 교류는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다.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일하고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 그들끼리 일하고 놀면서 아이디어를 주고받다 보면 새로운 산업을 잉태할 스타트업을 키워낼 수 있지 않을까.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한데 모여 살게 하면 고독사를 해결하고 초고령화 사회 의료비 부담도 줄어들지 않을까.
마을 만들기는 도시 한복판에 농촌 부락을 조성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세련되게 세울 수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억지로 모으기보다는 비슷한 성향과 수요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모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훨씬 쉽다. 육아 공동체, 창업 공동체, 고령자 공동체, 예술인 공동체 등 관계 맺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것이 마을 공동체의 시작이다.
얼마 전, TV에서 연예인들이 아파트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하루종일 웃고 떠드는 예능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좁은 아파트를 뛰어넘어 하나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면 시민들이 같이 웃고 떠들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요즘 시대 마을을 복원하는 방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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