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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가이자 최장수 서울시장이었던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명함엔 한때 ‘소셜 디자이너’라는 직책이 붙어 있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열망이 담긴 단어였다. 임기 후반 2년을 막 시작한 지난 6일,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빗대어 열정적으로 소명을 실천하겠다던 그가 이렇게 허망하게 퇴장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뒤 박 시장은 2014년·2018년 지방선거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역대 서울시장 중 3선에 성공한 사람은 박 시장이 처음이다. 기존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문법과 행동으로, 낯설지만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9년간 시장직을 이어왔다. 광화문광장에서 벼농사를 짓기도 했고, 서울의 동서남북을 자전거 도로로 잇겠다는 꿈도 꿨다. 대표적인 박 시장의 정책으로 꼽히는 ‘제로페이’와 ‘따릉이’는 시행 초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점차 서울시민의 생활을 바꿔놓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서울시의 고위 간부는 “도시경영에선 박원순 시장을 능가하는 이가 없다”고 촌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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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던 그는 1994년 영국 유학 생활을 마친 뒤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참여연대를 설립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참여연대 시절 1인 시위라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었다.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국회의원 낙천·낙선 운동을 주도했다.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를 차례로 창립하며 ‘시민운동의 대부’로 자리매김했다.
최장수 서울시장이었지만 대중적인 인기가 그리 높지 않았던 점은 박 시장에겐 고민거리였다.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박 시장의 지지율은 줄곧 2~3%대에 머물렀다. 박 시장은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지율은 바뀌는 것”이라고 언급해왔지만, 대중의 분위기에 민감해했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최근 그는 기존 ‘행정가’로서의 이미지에 변화를 주려 애쓴 것으로 전해진다. 공식적으론 대선 도전을 밝히지 않았지만, 도시 경영보다 국가 경영자로 거듭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한 측근은 “정(政)이 없고 치(治)만 있어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지인들의 조언을 박 시장이 인식하고 있었다”며 “단순한 행정가를 뛰어넘는 정치적 리더십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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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정/박종관 기자 agatha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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