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이 이달 초 중국에 원유 300만 배럴을 위안화를 받고 팔았다. 7대 석유 메이저 중 한 곳에서 달러화가 아니라 중국 위안화로 원유를 거래한 첫 사례다. 원유시장에서 ‘석유달러(페트로달러) 체제’에 균열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19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BP는 상하이선물거래소(INE)에서 위안화를 받고 이라크산 원유 300만 배럴을 산둥성에 있는 INE 저장시설에 이달 초 인도했다. 세계 5대 에너지거래업체 중 하나인 머큐리아도 다음달부터 두 달간 INE에서 원유 300만 배럴을 거래하고 이를 위안화로 결제할 예정이다.
중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각국 원유 수요가 크게 꺾인 것을 기회로 보고 세계 최대 구매력을 앞세워 석유 메이저들에 위안화 거래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른바 ‘페트로위안’ 체제를 구축해 위안화 국제화로 연결하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최근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과 코로나19 사태 책임론 등을 놓고 미국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위안화 국제화를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 원유시장의 중국 의존도가 크게 높아지면서 사정이 확 바뀌었다. 세계 각국이 수요 감소 영향으로 원유 수입을 줄이는 반면 일찍 경제 재개에 나선 중국은 원유 수입을 대폭 늘리면서 산유국의 구명줄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달 중국 원유 수입량은 하루평균 1290만 배럴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수입량이 전년 동기 대비 약 34% 늘었다. 반면 세계 원유수입 2위 미국은 아직도 수요 둔화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위 인도는 일부 지역이 재봉쇄에 들어갔다. 지난달 인도 원유 수입량은 전년 동기 대비 약 55.3% 떨어졌다.
중국 기업과 ‘큰손’ 투자자들이 최근 유가 폭락을 틈타 원유 사재기에 나선 것도 글로벌 기업이 위안화 거래에 뛰어든 배경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위안화 표시 하루평균 원유 거래량은 작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이에 따라 지난달엔 중국 INE 원유선물 가격이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보다 배럴당 3~4달러가량 높아졌다.
이 같은 움직임은 지난 14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홍콩에 대한 특별지위를 박탈하고, 홍콩의 자유를 제한하는 중국 당국자와 거래하는 은행을 제재할 수 있게 하는 ‘홍콩자치법’에 서명하면서 더 거세졌다. 중국은 홍콩에 역외시장을 개설하고 중국 제품을 수출할 때 홍콩에서 위안화 결제를 유도해 왔다. 그러나 미국의 조치에 따라 외국 기업이 대거 홍콩을 떠날 경우 홍콩의 위안화 국제화 전진기지 기능이 약화될 전망이다.
중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에도 원유 위안화 거래를 압박하고 있다.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가 수출하는 원유 중 절반가량이 아시아에 수출된다. 이 중 상당 부분이 중국으로 향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은 서방보다 약 두 달 앞서 경제 재개에 들어갔고, 낮은 가격을 이용해 원유를 사들이고 있다”며 “중동 산유국들이 원유 수요를 중국에 대거 의존하고 있다 보니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분석했다.
선한결/강현우 기자 alwa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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