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 인도,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 1년이면 120일 이상 세계의 커피 산지에서 보냈다.
지금은 100여개 농장, 12개국과 거래한다. 연간 40개의 컨테이너, 800t의 커피 생두를 들여와 로스팅하고, 이를 국내 400여 개 카페에 보낸다. 국내 스페셜티 커피업계에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온 '파란 복면'의 커피, 서필훈 커피리브레 대표(43)의 이야기다.
커피리브레는 이달 상하이에 중국 1호점을 낸다. 과테말라점에 이은 두 번째 해외 매장 진출이다. 커피리브레는 10년 만에 국내 매장 4개를 운영하며 연매출 112억원(지난해 기준)을 내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로 성장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생두 바이어들 사이에서도 드물게 니카라과에 56만㎡(17만 평) 규모의 '핀카 리브레' 커피 농장을 보유한 회사이기도 하다.
연남동 낡은 술 창고와 동진시장서 시작
커피리브레는 8년 전 서울 연남동 동진시장에 1호 카페를 열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생두 무역상이자 로스팅 전문 기업이었다. 국내 1호 큐그레이더(원두감별사)인 서 대표가 중국 술의 창고로 쓰던 낡은 건물에서 생두 로스팅을 하면서 시작했다. 로스팅 교육도 했다. 원두 산지 직거래도, 로스터라는 직업도 생소한 때 커피리브레는 스페셜티 커피 업계의 비공식 사관학교가 됐다.
서 대표는 어느 날 사람들에게 원두를 알릴 수 있는 '쇼룸'을 만들기 위해 연남동 동진시장 골목 안에 월세 30만원을 내고 가게를 얻었다. 주변에선 "다 망한 시장 골목에 누가 커피를 마시러 오겠냐"고 말렸다. 지금 동진시장 일대는 카페뿐만 아니라 맛집이 즐비한 연남동의 중심 상권 중 하나가 됐다.
역사학도였던 서 대표가 커피에 빠져든 건 우연한 계기였다. 그는 고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러시아 페미니즘'을 연구하고 있었다.
공군 장교로 40개월을 복무하고 석사 과정까지 수료한 뒤 50일 간 쿠바 여행을 떠났다. 쿠바의 바닷가에서 가난하지만 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들의 삶에 반했다.
한국에 돌아와 학교 후문에 있던 단골 카페 '보헤미안'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커피를 배웠다. 보헤미안은 커피 명인 박이추 선생이 운영하다 제자에게 물려준 곳. 로스팅과 핸드드립 등 커피 전반을 익혔다.
이때 외국 서적과 논문 등을 모두 뒤져 자료를 모으고 커피에 대한 모든 지식을 익혔다. 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가 주는 큐그레이더(커피감별사) 자격도 땄다. 세계 로스팅 대회에서 유럽, 일본 경쟁자들을 제치고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때부터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니카라과에 17만 평 농장을 산 남자
5년 간의 수련을 거쳐 그는 2009년 10월 커피리브레를 열었다. 세계적인 커피 전문가인 일본인 유코 여사를 우연히 알게 돼 이듬해부터 커피 산지의 네트워크를 조금 빠르게 섭렵할 수 있었다. 5000만원으로 창업한 커피리브레는 처음 3년 간은 적자였다. 이후엔 매년 10%씩 성장했다. 커피의 본질인 재료에 충실한 브랜드라는 게 알려졌고, 서 대표가 직접 가르치는 로스팅 수업은 '대한민국 로스터들의 사관학교'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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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과 기술에 대한 고집과 집중. 그것은 커피리브레만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커피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노력은 2016년 니카라과의 커피 농장을 사들이며 정점을 찍었다. 거래처였던 농장이 매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구매를 결심했다.
"1년간 5번에 걸쳐 할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했어요. 해마다 작황이 좋은 농장을 찾아다니면 되는데 왜 농장을 보유하냐고 다들 미쳤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농장에서 우리만의 품종, 가공방식을 실험할 수 있어요.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에서 진정한 '씨드 투 컵(seed to cup)'을 실현한 셈이죠. 커피나무에 가장 알맞는 노르웨이산 유기농 비료를 뿌리면 생두의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 직접 해볼 수 있으니까요. 농사를 지어봐야 커피를 제대로 아는 것 아니겠어요?"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커피리브레의 니카라과 커피 농장 '핀카 리브레'는 올해 수확량이 증가해 수출도 시작했다. 싱가포르 유명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인 '나일론 커피'에 생두를 납품한다.
파란 레슬링 복면의 비밀
서 대표가 커피리브레를 운영하며 요즘도 가장 중요하게 챙기는 두 가지는 '로스팅'과 '디자인'이다. 아무리 수입하는 생두 양이 많아져도 직접 현지에서 고르고, 로스팅 하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는다.
디자인도 그렇다. 회사의 상징인 '파란색 레슬링 복면 쓴 남자'와 회사명 '커피 리브레'는 영화 '나초 리브레'에서 영감을 얻었다. 로고는 영화 속 주인공인 프라이 토르멘타(폭풍 수도자)가 레슬링 링 위에서 신분을 숨기기 위해 써야 했던 마스크를 빼닮았다.
영화 '나초 리브레' 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수도사가 고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기 위해 복면을 쓰고 레슬링에 몰래 도전하는 실화 바탕의 이야기. 25년간 레슬링으로 돈을 벌어 2000명의 아이들을 키워낸 세르지오 구티에레스 신부의 헌신은 물론 '리브레'에 담긴 '자유'와 '열망'에 반했다고 한다.
가장 신성한 일과 가장 세속적인 일을 동시에 해낸 성직자의 삶을 동경하는 마음을 담았다. 커피 리브레의 파란 복면은 승리의 포효가 아니라 링으로 올라가는 레슬러의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은' 오묘한 표정을 담았다. 커피 원두 패키지, 컵에 담기는 일러스트는 서수연 작가와 협업하고 있다.
10년간 모은 커피 아카이브만 700건
커피 리브레는 국내 스페셜티 커피 업계에 생두 직거래 시장을 연 회사이자 스페셜티 커피를 키운 사실상 1세대다. 커피만 나눈 것이 아니다. 지식은 더 크게 나눴다. 커피리브레 홈페이지 '아카이브' 코너에는 커피 논문과 커피 관련 국내외 뉴스가 다 번역돼 있다. 전문 번역가가 회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전문 서적은 번역서로 여러 권 출간하기도 했다. 커피에 입문하며 어렵게 해외 논문 등을 번역했던 수고로움을 후배 커피인들과 자유롭게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배경이 됐다.
'남들이 안하는 일'은 회사의 DNA가 됐다. 국내 스페셜티 커피 업계 최초로 원두 정기배송 서비스인 '커피리브레 장복'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국내 스페셜티 커피 업계에서 처음으로 인스턴트 커피 '나초'도 내놨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편한 방식으로 스페셜티 커피를 맛볼 수 있게 하려는 시도다.
서 대표에겐 전 세계 아이들이 그려 보내온 파란 복면 그림이 한가득 있다. 온두라스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을 지원하고, 인도 아라쿠 지역에선 기숙여학교 학생 150명의 학비와 기숙비를 지원하는 등 커피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커피로 번 수익을 함께 나누는 일을 하고 있는 것. 최근 커피 리브레 10주년 기념 원두도 판매 금액 2000만원을 전액 가정폭력 쉼터 등에 기부하기도 했다.
'커피리브레'라는 이름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레슬링으로 번 돈으로 아이들을 키워낸 수도사처럼 커피로 번 돈으로 커피 농부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커피리브레의 공식 홈페이지 대문에는 이런 말이 써있다.
"커피를 매개로 만나는 사람들의 미각적 행복과 기술적 진보를 위해 노력한다. 커피를 만드는 최초의 인간, 농부들에게 실질적 고마움과 구체적 희망을 전할 수 있기를. 삶은 유한하고 즐거움은 끝이 없어라." /destinybr@hankyung.com
※본 기사에 쓰인 사진은 커피리브레가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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