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캐피털마켓 워치] 정부의 비우량 회사채 매수 ‘도박’

입력 2020-07-31 08:56   수정 2020-08-25 08:45

≪이 기사는 07월31일(06:42)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당신이라면 중간 정도의 신용등급(A)에 연 2%대 이자를 주는 회사채를 사시겠습니까.

위험 대비 매력적이지 못한 금리로 투자자 찾기에 애를 먹던 A급 회사채 발행이 8월부터 크게 늘어날 전망입니다. 정부의 저신용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기구(SPV)가 지난주부터 최대 20조원의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매수 작업을 개시했기 때문입니다. 경기 회복 때까지 민간의 빈자리를 채워 자금난에 빠진 중견·대기업을 돕겠다는 취지입니다.

사상 초유의 정책적 저신용 회사채 매수는 경기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일시적 충격에서 곧 탈출할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기업 신용등급의 강등 위험(부정적 전망)이 역대 최고 수준이지만, 나중엔 충분한 가치를 받고 되팔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죠. 자본시장도 정부 방침에 지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일시적인 시장의 경색이 기업의 연쇄 부도로 번지는 사태를 바라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지원은 앞으로 경기 방향에 따라 논란을 부를 수 있습니다. 기대와 달리 경기 회복이 늦어진다면 ‘신용 버블(credit bubble)’만 키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서입니다. 낮은 이자비용으로 자금을 공급해 이른바 ‘좀비 기업’을 양산하는 사태입니다.

그렇다면, 정부는 ‘지금 비우량 기업의 유동성 부족이 일시적이고, 곧 경기가 회복해 문제를 해소할 것’이라고 얼마나 확신하고 있을까요.

추정컨대 초유의 코로나19 사태에서 한국 금융당국은 물론, 한 발 앞서 같은 정책을 펼치고 있는 미 중앙은행(Fed)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Fed 의장을 지낸 폴 볼커는 1992년에 펴낸 회고록 CHANGING FORTUNES(2020년 《달러의 부활》로 한국어 번역본 출간)에서 1980년대 중남미 국가 지원 결정을 떠올리며 “상환능력 상실과 유동성 부족을 구분해내는 것은 현실세계에서는 교과서처럼 쉽지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상환능력에 의문이 없는) 순수한 유동성 문제라는 사례는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심각한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시장 원칙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A 등급 회사채(3년물) 평가금리는 최근 연 2.1% 안팎으로 상당히 낮은 수준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신용 위험이 상승했지만 작년 말 2.2% 대비 되레 낮아졌습니다.

따라서 비우량 기업들이 이자를 더 제시한다면, 과도한 부담없이 투자자의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김상만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신용도 및 시장 참가자들의 인식을 감안해 볼 때 현재 (비우량 회사채) 금리 수준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습니다. 금리를 올리는 것이 수요 회복의 대안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일단 정부가 비우량 회사채를 본격적으로 매수하면 그 혜택을 누리려는 수요는 상당할 것입니다. 김은기 삼성증권 연구원은 “SPV의 미매각물(안 팔린 회사채) 매수로 8월에 A등급 발행이 증가하고, 신용스프레드 축소(회사채 가격 상승)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이제 투자자들은 정책이 떠받치는 회사채 ‘랠리’의 최종 결과물이 시장의 안정일지, 아니면 좀비 기업의 양산일지를 고민하면서 추종 매수 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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