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연이은 ‘부동산 철퇴’에 집과 건물을 처분해 마련한 뭉칫돈이 주식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부동산에 집중돼 있던 자산가들의 포트폴리오가 급변하면서 재테크 시장은 주식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재테크를 조언하는 프라이빗뱅커(PB)들이 전하는 사례에서도 이런 흐름이 확인된다.
서울 잠실 트리지움 115㎡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던 70대 여성 A씨는 최근 24억원에 집을 팔았다. 소득이 없는 그에게 작년 400만원에서 올해 800만원으로 오르고, 내년 1200만원으로 늘어날 종합부동산세는 큰 부담이었다. A씨는 33㎡형대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겼다. 남은 자금은 증권회사 발행어음에 투자하고 종합자산관리계좌(CMA)에 넣었다. A씨는 요즘 애플 등 해외 우량주식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60대 남성 B씨도 같은 이유로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를 최근 처분했다. 매각 자금 가운데 3억원을 국내 주식에 투자했다. 기존 투자금과 합쳐 주식 자산이 약 5억원으로 늘었다.
고액자산가를 중심으로 탈(脫)부동산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PB들은 전했다. 주식을 유망 자산으로 보고 있다. 미래에셋대우 NH투자증권 삼성증권 신한금융투자 KB증권 대신증권 등 6개 증권사에서 고액자산가를 담당하는 PB 50명을 상대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76%가 더 이상 부동산 투자를 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고액자산가들도 약 80%가 주식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진곤 NH투자증권 프리미어블루 강북센터 상무는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규제로 더 이상 부동산으로 자산을 늘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고액자산가들이 자산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했다.
증권사 강남 지점에 수십억 싸들고 오는 6070
경기도 도시개발 관련 보상금으로 30억원을 받은 L씨는 새로운 임대용 꼬마빌딩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최근 상업용 부동산 수익률이 하락하자 빌딩 매입을 포기했다. 그 대신 난생처음 주식 투자에 나섰다. 삼성전자, LG화학,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우량주 중심으로 13억원을 분할 매수했다. 나머지 자금은 주식계좌에 넣어놨다. 추가 투자할 타이밍을 보고 있다.
부동산 수익에만 의존하던 C씨는 요즘 채권 투자를 시작했다.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부동산 투자를 선호해왔지만 임대 수익보다 세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PB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매년 일정하게 이자 등이 나오는 인컴형 자산을 확보할 수 있는 투자처를 물색하던 그는 최근 은행의 외화표시 채권에 7억원을 투자했다.
이처럼 부동산 부자들 사이에서는 위기감이 퍼지고 있다. 부동산이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 60대와 70대 들어 인생 첫 주식 투자를 위해 증권사 창구를 찾는 이들이 급증한 이유다. 코로나 폭락장 이후 떠들썩하게 관심을 받던 주식시장을 지켜보다 뒤늦게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황성훈 미래에셋대우 서초WM PB는 “기존 포트폴리오를 고수해야 할지, 바꿔야 할지 투자자들의 고민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진 상황”이라며 “제로금리, 부동산 규제, 코로나19가 투자 패턴에 변곡점을 그려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일변도인 자산 포트폴리오가 변화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부동산과 예금에 의존했던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다양한 금융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박영호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구위원은 “부동산 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0년을 맞이한 일본이 자산 구성의 변화를 꾀하지 못하다 뒤늦게 금융 투자자산을 늘리기 시작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쫓기듯 부동산을 팔아 다른 투자처를 찾아나서는 현상에 대한 우려도 상당하다.
박재원/박의명 기자 wonderf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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