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서예가 - 김개미(1971~)

입력 2020-08-16 17:21   수정 2020-08-17 01:35

그가 울면
그 집 수건이 까맣게 변할 것 같다

그의 집 책장 뒤에는
아직 발견된 적 없는 품종
죽순 같은 글씨가 자라고 있을 것이다

시집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걷는사람) 中

서예가는 정갈한 먹물을 붓 끝에 달고 사는 사람이지요. 먹을 갈고 붓을 찍어 쓰는 글씨, 이 여름에 쓰는 글씨는 죽순을 닮아갑니다. 죽순은 빗소리를 머금고 자랍니다, 하늘 높이 자랍니다. 자라다보면 어느새 대나무가 됩니다. 그 대나무로 엮은 책 옆에서 서예가는 간만에 젖은 마음을 말립니다. 참으로 장마가 깁니다. 그 집 책상 뒤에도 ‘죽순 같은 글씨’가 자라고 있겠네요. 이 비 그치면 고추잠자리 꼬리처럼 붉은 가을빛이 몰려올 것이라 믿습니다.

이소연 시인(2014 한경신춘문예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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