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신공항 건설 추진과정에서 대구·경북민들은 오랜만에 지역의 거대현안 해결을 위해 사력을 다해 뛰는 지도자를 경험했다. 그 지도자는 이철우 경북지사와 권영진 대구시장이다.
통합신공항 유치신청을 이끌어내 무산을 막는 과정에서 지역민은 큰 지도자, 즉 그랜드 디자이너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랜드 디자이너는 경부고속도로나 인천신공항, 경부고속철처럼 논란이 될만한 일도 적극적으로 공론화하고 지역발전의 대안으로 이끌어 내는 지도자를 의미한다.
지난 7월 30일 군위군이 유치신청 조건으로 막판에 요구한 합의문에 국회의원 25명 전원, 경북도의원 60명 중에 52명의 서명을 네 시간만에 받아내는 데는 이 지사가 큰 역할을 했다. 권 시장은 “3선의원 출신인 이 지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이 지사는 권 시장에게 공을 돌렸다. “국방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권 시장이 4년간 외롭게 신공항 사업을 끌고 왔다”며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 지사의 정치력과 권 시장의 뚝심으로 다행히 무산은 막았지만 통합신공항 추진 과정에서 지역 정치권의 역할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됐다. 정치권이 마지막에 서명하는 역할에 그쳐서야 되겠느냐는 지적이다. 정치적 유불리 때문에 중요 미래 현안에 대해 눈을 감은 결과다. 통합신공항 이전을 반대하거나 합의문 서명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의원들도 ‘본인 때문에 무산됐다’는 책임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한 경우도 많았다는 후문이다.
군위와 의성이 유치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소멸위기에 처한 지역에서 이처럼 다양하게 지역발전 아이디어가 나온 적도 없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소멸위기 지역을 살리기 위해 잠재된 아이디어를 공론화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는 데 대구·경북 정치권이 그동안 소홀했다는 반증이다.
글로벌 갈등조정 전문가로 남아공과 콜롬비아 태국의 분쟁 등 집단갈등을 푼 성공사례를 담아 《협력의 역설》이라는 책을 펴낸 애덤 카헤인은 첨예한 갈등관계에 놓인 지역에서 협력에 성공하는 조건에 대해 밝힌 바 있다. 그 조건은 첫째가 처음부터 어떤 합의도 하지 않고 시작하되 문제(위기)상황에 놓여있다는 데는 합의한다는 원칙이다. 둘째는 미래에 대한 여러 시나리오를 만들되 한 가지 시나리오만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그 조건은 현재 상태를 그대로 두는 시나리오다.
대구와 경북은 1981년 서로 분리된 뒤 40년간 수도권이나 충청권에 비해 도시의 위상이 크게 추락했다. 대구경북 인구비중은 1980년 13.2%에서 올해 7월 9.7%로 줄어들었다. 청년 비중은 7%대다. 지역내 총생산 비중은 1985년 11.8%에서 지난해 8.6%로 낮아졌다. 대구·경북의 위기를 인정하고 변화에 대한 시나리오를 적극 모색해야 할 때다.
단체장과 정치인, 특히 그랜드 디자이너가 바쁘게 다녀야 할 곳은 행사장이나 협약식 등 박수받는 현장이 아니라 위기의 현장이다.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하더라도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적 이해가 엇갈리는 문제에 대해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과감하게 공론화해야 한다. 토론과 설득을 거쳐 조정능력을 발휘해 합의를 만들어내는 지도자가 그랜드 디자이너다. 대구·경북의 이해가 엇갈릴 대구경북 행정통합이나 취수원 이전문제도 위기가 더 심화되기 전에 애덤 카헤인의 두 가지 원칙 아래서 공론화하고 추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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