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가 전격 사임했다. 직접적인 사유는 만성 궤양성 대장염이라고 하지만 취임 이후 △사학 비리 △북한 대응 실패 △한국 수출통제 패배 △소비세 인상 실수 △도쿄올림픽 고집에 따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처 미숙 등이 겹치면서 국민의 지지도가 급락했기 때문이다.
포스트 아베 시대에는 많은 변화가 예상되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아베노믹스가 어떻게 될 것인지’가 최대 관심사다.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던 것은 배리 아이켄그린 미국 버클리대 교수가 지적한 ‘엔고의 저주’ 때문이다. 특정국 경기가 침체되면 통화 가치는 약세를 보여야 하지만 일본은 강세를 나타내 침체의 골이 더 깊어졌다.
‘경기 실상과 통화 가치가 따로 노는 악순환 국면을 차단하는 것이 일본 경제를 회복시키는 최후 방안’이라는 하마다 고이치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이 ‘아베노믹스’다. 2012년 말부터 아베 정부는 발권력까지 동원해 인위적으로 엔저를 유도해 경기를 부양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환율’이란 매개 변수로 인접국 혹은 경쟁국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정책이 추진 세력과 관계없이 지속될 수 있으려면 ‘공생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아베노믹스는 추진 초기부터 가장 우려됐던 점이 ‘로빈슨 크루소 함정’이다. 인위적인 평가절하는 대표적인 근린궁핍화 정책이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 추진 이후 각국의 태도를 보면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자국에 미칠 부작용을 우려해 반발하면서 환율전쟁에 가담하는 국가다. 엔저에 따른 유로화 강세 피해가 심했던 유럽 국가가 이 부류에 속했다. 다른 하나는 일본 경제가 당면한 디플레이션을 타개하는 자구책으로 인식해 엔저를 묵인했던 국가다. 미국이 유일했다.
2년 전부터 아베노믹스가 추진력을 잃은 것은 버팀목이던 미국의 태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도 환율 조작에서 피해갈 수 없다’고 경고했다. 미국 입장에서 아베노믹스의 한계를 비판한 첫 조치로, 그 후 발표된 환율 보고서에서 일본의 지위가 환율조작국 예비 단계까지 격상됐다.
아베노믹스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베 총리 전격 사임 소식이 알려진 직후 닛케이지수와 국제 환투기 세력 움직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닛케이지수가 큰 폭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국제 환투기 세력은 엔화 약세가 아니라 강세에 베팅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경제 실상을 반영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주가가 떨어지면 해당국 통화 가치는 약세가 돼야 한다. 하지만 아베노믹스를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할 경우 일본 경제는 고질병인 엔고의 저주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국제 환투기 세력은 이 점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안전통화 여부는 경기가 침체될 때 최종 대부자 역할을 누가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은 엔화표시 국채를 자국 국민이 96%를 갖고 있어 국가 부도 위험이 희박하다.
더 우려되는 것은 아베노믹스처럼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기대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정책당국이 어떤 신호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국민이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좀비 현상’이다. 1990년 이후 20년 이상 지속됐던 장기 침체 과정에서 일본 국민은 좀비 현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좀비 현상이 반복되면 ‘비이성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경제에서 비이성적인 행동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내가 하면 옳고 남이 하면 잘못됐다고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다.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차기 일본 총리가 누가 되느냐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베의 사임을 시작으로 우방국의 최고통수권자가 잇달아 교체될 가능성이 높아진 점도 주목해야 한다. 두 달 남짓 지나면 트럼프 대통령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입지도 종전만 못하다. ‘중남미 트럼프’로 불리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은 탄핵으로 몰리고 있다. 대외경제 정책 방향 등을 선제적으로 재정립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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