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가 먼저 보증금 1억 올리겠다네요"…알고보니 '꼼수'

입력 2020-09-16 11:10   수정 2020-09-16 11:23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한 헬리오시티 전용면적 49㎡ 아파트를 전세로 준 집주인 윤모씨(46)는 최근 세입자로부터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았다. 올 12월 계약 만기를 앞두고 세입자가 먼저 보증금을 1억원가량 올려주겠다고 연락한 것이다. 2년 전 계약한 전세가는 5억원. 현재 이 아파트의 전세 시세는 7억원 중반대로 치솟았다. 윤씨는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이번 계약이 아닌 다음 계약에 사용하려고 하는 듯했다"며 "이 경우 전세를 6년까지 내줘야하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임대차 3법'이 시행된 후 서울 부동산시장에서는 되레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먼저 보증금 인상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계약갱신요구권 행사를 한번 미뤄 '2+2+2년'의 거주를 하기 위해서다.
세입자들, 기존 전셋집으로 새 계약 맺으면 '2+2+2년' 보장
16일 송파구 가락동 인근 C공인 관계자는 "전세계약 만기를 앞두고 집주인들이 기존 세입자들과 새계약 체결에 대한 의견을 물어온다"며 "세입자들이 계약갱신요구권을 바로 쓰지 않고 보증금을 올려줄테니 계약서를 새로 쓰자는 제안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지난 7월31일부터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에 따르면 기존 전세계약에 대해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하면 '2+2년', 총 4년의 거주를 보장받는다. 예컨데 앞선 사례의 윤씨의 세입자의 경우 올해 계약갱신요구권을 요구하면 2022년 12월까지는 거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집주인과 세입자가 합의하면 임대료 상한선인 5% 내에서 임대료를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전세 계약을 '갱신'하는 게 아니라, 임대료를 5%를 초과해 인상하며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윤씨의 세입자는 총 6년의 전세기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계약갱신요구권을 새 계약 만료 시점인 2022년 12월로 미룰 수 있게 돼, 2024년 12월(계약갱신·5% 내 인상)까지 2+2+2년의 거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공인중개업소 대표는 "앞으로 2년 전세계약 만료를 앞둔 경우 임대료를 5% 이상 초과해 다시 전세 계약을 맺는 것이 언뜻 들으면 집주인에게 유리한 방식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며 "세입자들이 계약갱신요구권을 한번 미뤄 사용할 것을 계획하는 경우엔 거주 보장기간이 크게 늘어나는 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몇 년 새 서울지역 전세 시세가 크게 올랐다는 점에서도 5%를 조금 넘게 인상하는 것은 집주인들보다 세입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 KB국민은행의 월간 주택가격 동향 시계열 자료를 보면 올해 8월 서울 아파트 중위 전세가격은 4억6876만원으로 기록했다. 이는 2년 전인2018년 8월(4억3122만원)과 견주면 3754만원 높아진 것이다. 변동률로 따지면 9% 가까이 된다.

특히 강남, 목동 등 거주 선호지역의 경우 2년만에 시세 격차가 더욱 급격하게 벌어졌다. 대치동 '래미안대치팰리스 1단지' 전용 59㎡는 최근 전세시세가 약 14억원에 육박한다. 2년전인 2018년 6월 전세 실거래가가 10억원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40%가량 치솟았다. 목동 '현대하이페리온' 전용 151㎡는 2년 전에는 12억5000만~13억원선에서 전세 거래가 이뤄졌지만 최근엔 16억5000만원까지 호가가 상승했다. 값으로는 최고 4억원, 변동률로는 32% 뛰었다.
'세입자 내보내기' 골머리 앓는 집주인들
집주인들 사이에선 볼멘소리가 나온다. 지방에 거주하며 서울 서초동의 아파트는 전세를 주고 있는 임차인 김모씨(62)는 "그간 전세시세가 크게 뛰고 보유세 등 각종 세금도 늘어난 탓에 세를 준 아파트에 대한 부담이 커졌는데 4년씩이나 전세가 묶였다"면서 "당장 임대료를 조금 더 올려 세입자와 새 계약을 맺자니 6년이나 전세를 줘야하는 셈이 되니 앞으로 주택 매매 계획을 어떻게 짜야할 지 난감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집주인들 사이에선 세입자 내보내기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최근에는 세입자의 계약기간이 남아있으면 새 집주인이더라도 입주가 불가능하다는 유권해석까지 나오면서 집주인들의 속은 더 타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매매계약의 당사자는 기존의 임대차 계약 내용을 승계하게 된다"며 "세입자가 이전 집주인에게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했다면, 새로운 집주인이 실거주한다고 해도 추가로 2년을 더 거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법무부도 "세입자가 이미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했다면, 새 집주인이 실거주를 원할 경우 계약 단계에서 세입자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집주인이 잠깐 들어와서 살다가 다른 세입자를 받는 방법이 얘기되고 있지만, 이 마저도 녹록치 않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집주인이 직접 들어와 살겠다고 허위로 얘기하거나 잠깐 들어와서 살다가 다른 전세 계약을 맺었다면 기존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 세입자가 집주인을 감시해야 하는지, 별도의 기관이 이런 부당한 거래를 감시하는지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 또 기존 세입자를 내보냈지만 갑자기 지방 발령이 나서 실거주 의무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세를 놓는 등 불가피한 경우라면 손해배상을 피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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