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에서 합법적으로 베팅할 길을 막아놓으니 오히려 불법 온라인 도박이 판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조재기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70)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그를 만난 지난 17일은 ‘서울올림픽 개최 32주년’ 기념일. 손님맞이로 밝아야 할 그의 얼굴엔 그러나 미소 대신 절박함이 가득했다. 공단은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의 ‘유산’이다. 올림픽이 끝난 후 남은 돈 3000억원을 씨앗 삼아 출범했고, 이를 차곡차곡 불려 한국 스포츠 재정의 92%를 책임지는 대표 공익기업으로 컸다.
조 이사장은 “코로나 사태로 기금 확보의 젖줄이던 경륜·경정 등 스포츠 베팅 사업이 올스톱되면서 공단이 기금 고갈 등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처했다”며 “온라인 발권 허용 등 언택드 시대에 대비한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단은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 스포츠, 체육의 ‘젖줄’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해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1조8000억원의 체육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공단은 지난 2월 23일부터 중단한 경륜·경정사업 올해 매출이 각각 3864억원과 1209억원에 그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는 전년보다 각각 75%, 80% 줄어든 규모다. 정부 곳간도 쪼그라들었다. 올해 경륜·경정에서 나오는 레저세 등은 전년 대비 2724억원 감소한 811억원으로 예상된다. 이익이 날 때 적립하는 체육진흥기금은 한 푼도 쌓지 못할 처지다. 조 이사장이 “임원 급여를 지난달부터 20~30% 반납하고 전 직원이 번갈아 휴직하며 비용 절감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고 털어놨다.
이대로는 모두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현재 국내 경륜·경정은 ‘오프라인 발권시설’을 갖추도록 하고 있어 사실상 온라인으로는 베팅할 수 없게 돼 있다(경륜·경정법 제9조2항). 조 이사장은 “이미 스마트폰은 생활화된 지 오래인데, 그 이익을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온라인 불법 도박업체들만 누리고 있다”며 “시대 변화에 맞춰 제도를 손질하는 등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불법 도박 시장 규모는 82조원. 합법 시장의 3.6배에 달한다. 직접 현장을 찾지 않고도 온라인으로 간편히 베팅하는 장점을 홀로 누렸기 때문이다.
조 이사장은 “한국은 온라인 발권이 안 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라며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의 엄격한 관리와 본인 인증 등 기술을 결합해 온라인으로 합법적이고 건전한 스포츠 베팅을 할 수 있게 하면 불법 도박문제도 해결하고 공익 재원도 훨씬 더 많이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과 싱가포르 등에서 경륜·경정 온라인 발매를 도입한 뒤 불법 도박이 줄어든 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몬트리올올림픽 유도 동메달리스트이자 대한체육회 이사 등을 지낸 조 이사장은 한국 체육의 원로다. 조 이사장은 “최근 체육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미스러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체육인들의 경제적 기반도 함께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은퇴 선수들이 고용 불안정 등으로 학연·지연에 연연하게 되고 이렇게 생긴 기형적인 권력 관계가 상당 부분 폭행 같은 사회 문제로 이어진다는 것이 조 이사장의 진단이다. 조 이사장은 “스포츠인과 관계인까지 하나로 묶어 경제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체육가족공제회’를 만들고 싶은 게 임기 내 마지막 바람”이라며 “공단에서 사업 자금을 융자해 체육인 공제회 등을 설립한다면 체육계가 훨씬 더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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