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압박 핑계…與, ILO협약 비준 강행하나

입력 2020-09-21 17:21   수정 2020-09-22 01:14

정부와 여당이 연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다음달 한·유럽연합(EU) 간 자유무역협정(FTA) 전문가패널의 심리가 열린다. ‘한국이 ILO 핵심협약 비준을 하지 않는 것은 한·EU 간 FTA 협정 위반’이라는 EU 주장의 정당성을 심리하는 기구다.

전문가패널을 계기로 “한국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서두르라”는 EU의 압박은 한층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경영계에선 당정이 전문가패널 심리를 명분 삼아 이번 정기국회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 노동조합법 개정을 강행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21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한·EU 간 FTA 협정 내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章)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전문가패널 구두 심리가 다음달 8∼9일 열린다.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에선 한국과 EU는 ILO의 노동기본권 원칙을 존중·증진·실현하고 결사의 자유를 포함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EU는 2018년 12월 이 규정을 근거로 “한국 정부의 비준 노력이 부족하다”며 분쟁 해결 절차를 시작했다. 한국과 EU, 제3국 인사로 작년 12월 구성된 전문가패널 심리는 이 절차의 마지막 단계다.

당초 전문가패널 심리는 지난 4월 열릴 계획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연기됐다가 다음달 개최되는 것이다. 전문가 패널은 심리 이후 45일 안에 최종 판단을 담은 보고서를 낼 예정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심리 이후 전문가패널은 한국의 FTA 위반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린 뒤 권고 또는 조언을 담은 보고서를 양 당사국에 제출하게 된다”며 “만약 한국이 위반했다는 결론이 나오면 FTA 노동권 규정을 어긴 첫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계에선 이번 전문가패널 심리는 ILO 핵심협약과 관련 노동조합법 개정안의 연내 국회 통과 명분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하고 있다. 경영계 관계자는 “내달 전문가패널 심리가 열리는 때는 정기국회에서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둘러싼 입법 논의가 한창 진행될 시기”라며 “176석의 거대 여당과 정부가 EU의 통상 압박을 근거로 입법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경영계는 “정부가 ILO 협약 비준을 위해 EU의 압박을 실제보다 부풀려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한·EU FTA 협정의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에는 위반을 하더라도 관세 부과 등 어떠한 형태의 무역 제재를 하지 못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EU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요구하며 통상 압력을 가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FTA 위반”이라며 “한국 정부는 기업을 상대로 겁을 줄 것이 아니라 EU에 대해 당당하게 맞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경영계는 또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고 국내 법을 바꾸더라도 정부가 경영계의 의견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안과 함께 이들 협약 내용을 반영한 노동조합법 등 개정안을 지난 7월 국회에 제출했다. 실업자·해고자의 기업별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공무원의 노조 가입 범위를 늘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영계는 “개정안이 노동계의 요구만 담고 있다”며 “파업 시 대체근로 일부 허용, 노조의 부당노동행위 처벌 등도 반영돼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노동계에서는 이런 정부 개정안마저 철회하고 새 개정안을 만들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개정안에서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연장(현행 2년→3년)하고, 사업장 점거 금지 사항을 시행령에 위임한 것 등은 ‘노동권 개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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