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기업들의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 25일 국회 비대위원장실에서 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업규제 3법’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계가 강력 반대하는 집단소송법 제정,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까지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과거 BMW, 폭스바겐 같은 사태가 터졌을 때 다른 나라 소비자들은 보상을 받았지만 한국은 그러지 못했다”며 제·개정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기업규제 3법’에 대해선 입법 과정에서 독소조항을 걸러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문제의 경우 대주주가 의결권을 3%만 행사하거나 주식을 산 지 1년도 안된 주주가 소수주주권을 행사하는 건 문제”라며 “대한민국 잘못되는 입법 안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감사위원 선임시 대주주의 의결권을 3% 이하로 제한하는 규제를 완화하거나 소수 주주권 행사시 주식 의무 보유기간(현행 6개월)을 늘릴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한국의 미래를 위한 가장 큰 과제로는 ‘노동개혁’을 꼽았다. 김 위원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해고의 경직성, 노동시간 규제 등이 전부 현실과 맞지 않는 경직된 제도”라며 “이런 문제를 고치지 못하면 양극화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은 김 위원장과의 일문일답이다.
▷‘기업규제 3법’에 대한 찬성한 이후 보수 핵심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보수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보수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보수도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해야 지금까지 쌓아온 보수의 가치를 지킬 수 있습니다. 보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의 성찰’이라는 책에서 ‘프랑스가 과격한 혁명으로 군사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영국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변화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어떤 게 옳은가요. 우리나라에 이런 보수의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나요.”
▷국민의힘이 변화에 저항한다는 의미인가요.
“국민의힘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정치 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어요. 지난 총선에서 야당은 서울에서 대패했습니다. 경기도를 포함한 수도권 121석 중 국민의힘은 20석도 못 건졌습니다. 역대 선거에서 야당이 이렇게 대패한 적이 없습니다.”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30~40대 유권자를 봐야 합니다. 국민의힘에 대해 여전히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아 기본적인 지식 수준이 높고 정보 습득 능력도 앞선 사람들입니다.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의 전형적인 유권자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유권자들의 지지를 못받으면 앞으로 정당은 성공할 수 없어요.”
▷핵심 보수 지지층은 자유시장경제를 지켜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원론 첫 페이지에 시장 경제 원리가 나옵니다. 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경쟁 매커니즘이 작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시장 경제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 지 잘 알아야합니다.”
▷최근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집단소송 ,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해야한다는 얘기인가요.
“범위를 어느정도 정하든 건 입법 과정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 BMW, 폭스바겐 같은 사태가 터졌을 때 다른 나라 소비자들은 보상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집단소송제가 없어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입니다.”
▷소송이 남발될 우려도 있습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상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면 그럴(소송당할) 일이 없겠죠. 소비자를 속이려고 하니 두려운 겁니다.”
▷‘블랙컨슈머’처럼 제도를 악용하는 소비자도 있습니다.
“제도적으로 다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기업규제 3법’ 내용 중 수정해야 한다고 보는 조항이 있나요.
“(상법 개정안의) 감사위원 분리선출에 ‘최대주주 의결권 3%이내 제한’이나 주식을 산 지 1년도 되지 않은 주주들이 소수주주권을 행사하는 문제는 고쳐야 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개정안에는 소수주주권 행사할 때 주식을 6개월간 보유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을 피할 수 있는 조항 신설) 주식 보유 의무 기간을 더 늘리는 방향으로 수정을 하면 됩니다. 대한민국 잘못되는 입법 안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투기자본이 기업 경영권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도 큽니다.
“감사위원은 현재 자산규모 2조원 이상 대기업들의 경우 이사를 먼저 선임한 후 그 중에서 감사를 뽑도록 돼 있어요. 사실상 대기업 오너가 감사를 뽑아 기업의 감시가 제대로 안 되는 문제점이 생겨요. 감사위원 분리선임도 대주주가 3%의 주주권만 행사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입법 과정에서 개선을 해야지 무조건 반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힘을 찾아온 경제단체장들에게도 그런 얘기를 했나요.
“엊그제 손경식 경영자총협회장 등 경제단체장들이 우르르 찾아왔길래 기업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어요. 국가가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불공정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을 때 기업들은 이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물었어요.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 ‘월가를 점령하자’는 시민들의 저항이 나왔을 때 부호들이 직접 나서서 ‘세금은 부자들에게서 더 많이 걷으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회가 균형 잡히고 안정된 사회입니다. 기업들도 맹목적으로 (국가가) 기업들만 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 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기업들이 실질적으로 투명 경영을 하고 사회적으로 국민들에게 지탄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법 개정안은 다 필요가 없었겠죠.”
▷기업을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갖게 됐나요.
“기업들이 시장 경제와 법을 잘 지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업인들 중에는 ‘법을 잘 지키지 않아도 된다, 예외적으로 (법으로부터)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삼성이 왜 최순실 같은 사람을 포섭해서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나요. 대한민국의 일류 기업,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기업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해서 국민들한테 지탄을 받았느냐는 말입니다.”
▷대기업들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정치권력과 결탁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졌어요.
“대기업 오너 때문만은 아닙니다. 기업의 시스템이 과거에 해온 대로 지속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언론을 보면 김종인이란 사람이 과거 수십년 전 사고에서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을 하더군요.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재벌 개혁’, ‘재벌 해체’라는 얘기를 많이 했지만 저는 한번도 그런 단어를 써 본 적 없습니다. 재벌을 어떻게 개혁하고 해체합니까. 현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경제력을 가진 대기업도 최소한 국가가 정한 룰과 우리사회의 관행은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조지프 슘페터는 ‘국가가 정한 법과 제도를 지키면서 이윤을 많이 추구하는 기업인은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다’고 했어요.”
▷위원장이 생각하는 ‘경제민주화’와 민주당이 주장하는 ‘경제민주화’가 다른 것 같습니다.
“민주당을 한번 경험해 봐서 하는 이야기인데 민주당은 늘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런 법안을 제출했는지 저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딴 생각’이라고 하면.
“민주당은 기본적으로 20대 국회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을 처리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갑자기 저렇게 나오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국민의당 내부에서도 ‘기업규제 3법’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당의 정체성 반하는 일을 한다’,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에 역행한다’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왜 그런 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언론을 보고 ‘등 떠밀리 듯’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법률안도 다 읽어보지 않는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얘기를 하는 데 제가 어떻게 동의를 하겠습니까.”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사실 한국 경제에서 가장 큰 문제는 노동법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입니다. 경제단체들이 이런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있어요. 민주당도 그렇습니다. 국회의 의석을 180석 가까이 차지했으면 국가의 미래를 위해 관련 법과 제도를 고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노동개혁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으로 그런 얘기를 적극적으로 하려 합니다. 한 편에는 기업의 투명성 문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노동문제가 심각합니다. 전 세계 기업이 4차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고 있는 과정에 노사 문제는 정말 간단치 않은 이슈예요. 제가 한국의 노동 문제를 여러 번 고치려고 했는데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정치권이 힘이 있을 때 그런 개혁을 해야 하는데, 여당의 책임있는 정치인은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동 관련 법과 제도에선 어떤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보나요.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가 가장 심각합니다. 그 다음 소위 해고의 경직성, 노동시간 규제에요. 전부 기업의 현실과 맞지 않는 경직된 제도들입니다. 현 정부가 양극화 해소에 앞장서고 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풀지 못하면 양극화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실제 ‘노노 갈등’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한 기업에서 임금 코스트(비용)는 대개 상한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건비가 전체 비용의 20%라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20%에서 임금을 나눠 갖는 구조입니다. 정규직이 양보하지 않으면 비정규직이 많이 가질 수가 없어요. 노조 시스템도 잘못돼 있어요. 산별 노조가 아닌 기업별 노조 체제에선 노조에 가입된 직장인은 죄다 정규직입니다. 노사 협상이 정규직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는 이유죠. 이 문제를 고치지 않고선 양극화를 해소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1년6개월 후 대선이 있습니다. 차기 대통령은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할까요.
“당면 과제를 보세요. 첫째 세계가 개방화됐습니다. 외교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사회가 굉장히 다양해졌습니다. 다양성을 인식하고 이해 관계를 조정할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국민을 먹여살리려면 경제에 대해서도 조예가 있어야 합니다. 나라의 미래를 대비하려면 교육에 대해서도 철학을 가져야 겠죠.”
▷야당에 대선 후보가 너댓명 있다고 했는데.
“당 내에도 있고 당 밖에도 있어요. 그걸 지금 얘기할 수는 없죠.”
▷서울, 부산 시장 재보궐 선거도 눈앞에 왔습니다. 후보자들을 많이 만난다는데.
“소문처럼 많지는 않습니다. 이건 말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 유권자들이 정치권에 대해 신뢰를 하지 않아요. 민주당, 국민의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서울 시민이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그런 후보자를 찾아야 합니다.”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에게 ‘두 번의 배신을 당했다’고 책에 썼습니다. 어떤 교훈을 얻었나요.
“1963년 할아버지인 가인 김병로 선생님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정치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윤보선이 붓글씨로 ‘대통령 후보자나 당의 요직을 맡지 않겠다’는 친필 각서를 보내와서 야당 통합이 시작됐어요. 결국 윤보선은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박정희에게 대패했지요. 당시 할아버님은 ‘정치인의 각서는 효력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정치인은 급할 때 내장을 빼줄 것 처럼 하지만 목표가 달성되면 안면을 싹 바꿉니다. 제 나이 스물네살 때 깨달은 교훈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초심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최소한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는 정직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정직성도 없으니…”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본인이 그런 역할을 맡고 싶은 건가요.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선 취임 후 2~3년이 지나면 레임덕이 오는데 어떻게 할 수 있나요.(웃음)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보수주의자이면서 근대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을 도입했습니다. 19세기 후반 건강보험, 산업재해보험, 노령연금, 장애인연금보험 등 세계 최초의 혁신적인 복지제도를 잇따라 도입했습니다. 당시 반기를 들던 자본가들에게 “기업가들이 지금 정부에 협조하지 않으면 앞으로 사회 불만을 가진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기업인들을 공격할 수 있다”라고 하며 설득했습니다. 의회 역할을 완전히 무시한 반민주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가 후대 사람들에게도 영원히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좌동욱/고은이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