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질병관리본부에서 승격한 질병관리청이 또 하나의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코로나19 방역의 성패와 별개로 감염병 백신 관리 체계의 개선이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것입니다. 최근 불거진 독감(인플루엔자) 백신의 상온노출 사태를 계기로 국내 백신 관리에 대한 불신이 한껏 높아졌기 때문이죠. 이 사태엔 질병청의 관리 소홀 책임도 적지 않아 앞으로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9월25일 이후 부터 105명→224명→324명→407명→873명→1362명→1910명→2295명 식으로 연일 눈덩이 처럼 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질병청은 거짓말을 한 셈이 된 것이죠. 이유야 어쨌든 국민들은 질병청에 불신의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자칫 코로나19 방역으로 질병청이 얻었던 국민적 신뢰를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기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정부로부터 지정받은 유통업체가 백신을 생산 공장에서 일선 병·의원으로 배송하는 과정이 감시 사각지대였다는 점이 큰 문제로 보입니다. 국민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백신인 만큼 생산 뿐아니라 유통과정에서도 정부의 철저한 감시체계가 작동할 것으로 짐작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질병청은 이번에 사고를 낸 유통업체인 신성약품이 백신을 배송하는 과정에서 냉장차 문을 열어 놓거나 제품을 바닥에 내려 놓는 등 '냉장 유통(콜드체인)'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며 지난달 21일밤 접종사업 중단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 확인은 질병청의 감시 체계내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제보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제보가 없었다면 상온 노출이 의심돼 사용이 중단된 총 578만명 분의 백신은 아무도 모르게 접종됐을 수도 있습니다.
또 문제의 백신 접종자가 당초 발표와 달리 계속 늘어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병·의원에서 정부 지침을 어기고 자의적으로 국민들에게 백신을 맘대로 접종해도 질병청이 이를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도 드러났습니다. 정부 조달 무료 독감백신은 지난달 22부터 접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달 21일까지 접종받은 사례가 무려 142개 병·의원에서 1599건이었습니다. 접종 중단이 발표된 21일 밤 이후에도 꾸준히 접종한 사례가 적발되고 있습니다.
모두 정부의 독감 백신 예방접종 지침을 어긴 것입니다. 일부 병·의원은 정부가 제공한 무료 백신과 유료 백신을 따로 관리하지 않고 섞어서 막무가내로 접종한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모두 상온 노출 사건이 없었더라면 묻혔을 행태들입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 지금까지 내가 맞은 백신이 과연 제대로 된 백신이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이는 코로나19 사태로 감염병 예방과 방역의 중요성이 커진데 따른 정부조직 개편이었습니다. 또 정은경 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질본이 지금까지 코로나19에 비교적 잘 대응해왔다는 평가에 대한 보상 성격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덩치와 권한이 커진 질병청은 어깨도 무거워진 것입니다. 국민 건강과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국가의 제 1가치입니다. 이를 최일선에서 지키는 곳이 질병청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독감백신 상온노출 사고에 대해 질병청이 좀더 책임감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번 사태의 1차 책임은 백신 관리 지침을 어긴 유통업체이지만, 이를 관리 감독하는 질병청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병청은 'K방역'에만 취해 있지 말고 백신 개발·생산·유통 관리체계 전반에 대한 혁신을 서둘러야 합니다. 앞으로 나올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이 숙제가 가장 시급해 보입니다.
차병석 수석논설위원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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