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의 연말 인사시즌을 앞두고 임원들의 한 해 성과를 평가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국내 주요 기업은 대부분 11~12월 대규모 정기 인사를 한다. 이맘때는 임원들이 가장 긴장하는 시기다.
올해는 예년보다 긴장의 강도가 훨씬 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실적이 악화된 회사가 많기 때문이다. 항공 호텔 여행 등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기업은 이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올 상반기 대규모 적자를 낸 정유사 유통사들도 희망퇴직을 받는 등 고연차 직원과 임원을 대상으로 한 감원에 나섰다.
김상무 이부장들은 “목을 내놓고 일하는 기분”이라고 토로한다. “하필 이때 임원이 돼 왜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기도 한다. 올해 말 주요 기업엔 대대적인 ‘인사 태풍’이 몰아칠 전망이다. 전전긍긍하고 있는 김상무 이부장의 사연을 한국경제신문이 들어봤다.
CEO에 대한 문책성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후속 인사가 뒤따른다. 이 본부장은 사내에서 들리는 작은 소문에도 귀를 기울이며 내년 인사 방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올해는 대규모 물갈이 인사를 한다더라”며 후배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한 카드사의 강 부장은 내년에 맡게 될 보직이 최대 관심사다.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는 주요 보직을 맡아야 그나마 내년 말 승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장으로 정년까지 버텨야 한다. 그는 “올해 그래도 연초 세운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며 “인사에는 변수가 워낙 많아서 끝까지 실수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긴장하자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올해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이 오히려 부담인 경우도 있다. 박 상무가 몸담은 증권사는 올해 개인투자자의 주식 투자 열풍 덕분에 2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3분기도 좋았다. 4분기 실적 전망 역시 밝다. 후배들은 연말 성과급으로 얼마까지 받을 수 있을지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박 상무의 마음은 편치 않다. ‘반짝 호실적’에 그칠 것 같은 생각이 많아서다. 올해 상반기를 지탱했던 수수료 수입이 점차 줄어들고 채권 및 대체투자에서 평가손실폭이 커지는 등 내년도 실적에 경고등이 켜진 것 같다. 박 상무는 “코로나19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상이 불가능해져 코로나19와 무관하게 장기 생존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내년에 실적이 고꾸라지면 그 즉시 좌천될 수도 있어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중견기업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신 상무는 요즘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었다. 임원으로 승진한 지 1년밖에 안 됐지만 코로나19로 실적이 곤두박질치면서 내년 재계약이 사실상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창업 2세대인 회장이 최근 임원회의에서 마케팅 분야의 강도 높은 체질 변화를 주문한 것도 부담이다.
신 상무를 더 우울하게 한 건 그의 후임자를 둘러싼 소문이다. 2년 전 자회사로 발령 났던 박 상무가 돌아올 것이란 말이 파다하다. 당시만 해도 박 상무가 ‘물을 먹었다’는 평이 많았지만 자신이 물러날 경우 마케팅 분야에 정통한 임원이 없어 1순위 후임자로 꼽히고 있다. 신 상무는 “사람 앞길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지금이 딱 그렇다”며 “이직을 하자니 지금 같은 시국에 곧 은퇴할 나 같은 사람을 어디서 받아주겠냐”고 답답해했다. 그러면서 “모아 놓은 돈으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기업 임원들 상당수가 연말 인사를 앞두고 초조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임원 진급 대상인 부장급 직원들은 드러내놓고 얘기는 못하지만 승진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다.
국내 한 유통 대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는 정 부장이 그렇다. 바로 위 상무가 올해 전무를 달지 못하면 퇴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 부장은 작년 인사 때 한 차례 ‘물’을 먹은 바 있어 곧 자신의 차례가 올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마케팅 업무 경력만 15년 가까이 되는 만큼 자격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일한 리스크는 회사에서 임원을 아예 선임하지 않는 것이다. 정 부장은 “부서와 팀을 통합해서 임원 자리를 없애지 않는 이상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며 “하지만 요즘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가 연말 인사평가를 앞두고 ‘연차 사용률이 작년에 비해 크게 저조하다. 올해 남은 기간 각 부서장부터 연차 소진에 적극 나서달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임직원 연차 소진율이 30%를 밑돌자 회사 측에선 임원, 간부사원부터 연차를 쓸 것을 독려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연차를 사용하기도 쉽지 않다는 게 ‘딜레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데다 연차를 쓰라고 한다고 해서 쓰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연차를 써도 제대로 쉴 수도 없다. 국내 한 호텔에 근무하는 40대 후반의 이 부장은 최근 1주일 연차를 냈다. 지난 6월 한 달간 이미 무급휴가를 다녀온 터다. 회사에선 “쉴 사람은 더 쉬라”고 했지만, 사실상 강제 휴가나 다름없다. 휴가 기간에 그는 3박4일간 제주도를 갔다. 하지만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이 부장은 “애는 고등학생이고, 집 대출금은 갚아야 하는데 회사는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쉬고 싶은 기분이 들 리 없다”고 말했다.
김채연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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