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좁고 짧은 오솔길이라도 왕래(往來), 즉 ‘가다’와 ‘오다’가 있기 마련입니다.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길며, 가장 넓은 대통로인 실크로드야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생겨난 문명 수준의 격차로 인해 실크로드를 통해 이뤄지던 물자의 교류가 이윤 추구의 교역으로 변했어요. 그러다 보니 길의 시작과 끝을 둘러 싼 여러 갈등과 분쟁이 생겼죠. 그런데 정작 실크로드엔 시작과 끝이란 개념이 없어요.”
세계적 문명교류학자이자 실크로드 연구 전문가인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87·사진)은 지난 5일 서울 통인동 사무실에서 만나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최근 펴낸 신간 《우리 안의 실크로드》에서 실크로드의 ‘환지구성(環地球性)’, 즉 지구 위 땅과 바다를 가로지르며 순환 교류하는 실크로드의 개념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가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역설했다. 다음은 정 소장과 1문 1답이다.
▷책 제목의 ‘우리’는 어떤 의미입니까.
▶“지리적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가리킵니다. 인종학적으로는 한반도와 해외 교포를 포함한 전체 한민족을 뜻하고요.”
▷실크로드 위에서 한반도는 어떤 역할을 해 왔나요.
▶“실크로드의 중간 통로로서 한반도와 세계가 교류하는 핵심이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몇 가지 대표적인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7세기 고구려 사절이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에 다녀왔습니다. 8세기 통일신라의 승려 혜초가 인도에 다녀온 기록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당나라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함께 4대 여행기로 꼽힙니다. 조선시대엔 1896년 고종의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이 초원 실크로드의 대동맥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부설 현장을 답사했고요.”
▷한국의 실크로드 역사 연구는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중국이나 유럽보다 좀 늦게 시작하긴 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70여년 정도 됐죠. 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실크로드 연구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실크로드 사전이 편찬됐고, 실크로드와 관련된 논문과 단행본이 448권에 달합니다. 2013~2018년 경상북도의 ‘코리아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경주부터 터키 이스탄불까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전 구간 탐험, 울산에서 이스탄불까지 해양 실크로드 답사를 각각 마쳤습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전략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중국은 자국이 실크로드의 시작이자 끝 지점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다분히 중화중심주의적인 발상이죠. 실크로드의 환지구성을 무시하고, 실크로드를 유라시아 구대륙에만 한정하는 국한론(局限論)에 빠져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러다 보니 일대일로 전략의 공간이 줄어들었어요. 예를 들어 중국의 입장에선 중남미나 인도, 동남아 지역 같은 곳을 실크로드의 일부라고 내세우기 어렵거든요. 유라시아 대륙이 아니잖아요. 요즘 중국 학자들이 실크로드의 국한론적 개념을 계승해 온 기존 주장을 밀어내고, 새로운 개척이라는 목소리를 내는 게 이 때문입니다.”
▷인류 문명의 통로인 실크로드 위에서 각종 분쟁이 벌어져 온 현실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이 문제엔 본질적으로 세계주의와 민족주의 간의 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실크로드는 원초적으로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범세계적 자유왕래 통로였습니다. 하지만 수천년 전 국가라는 권력구조가 생겨나면서 이 통로는 국가와 그 예하의 민족 단위로 분할됐고, 실크로드는 토막길이 됐습니다. 서구 식민주의자들은 서구식 민족주의를 앞세워 일방적 식민주의 약탈과 침략을 합리화하려고 시도했죠. 실크로드의 환지구성과 유럽식 민족주의는 양립될 수 없어요.”
▷미래의 실크로드에선 개인과 국가, 민족, 종교 등 ‘길 위의 존재’가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요.
▶“‘세계의 일체성’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류가 공통적 조상을 갖고 있다는 ‘혈통적 동조(同祖)’, 세계 역사가 공통적 발전 법칙을 따라 변화한다는 ‘역사의 통칙(通則)’, 문명 간 부단한 소통과 교류가 이어지는 ‘문명의 통섭(通涉)’, 숭고한 보편가치를 다 같이 염원하는 ‘보편가치의 공유’ 등 4가지 요소가 발현되는 겁니다.”
▷실크로드에서 ‘세계의 일체성’이 성공적으로 실현된 후엔 어떤 새로운 존재가 등장할까요.
▶“인류의 보편문명(The Universal Civilization)일 겁니다. 보편문명은 정신적 보편가치와 물질적 보편가치로 구성됩니다. 선이나 정의,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이 정신적 보편가치입니다. 발달된 산업이나 기술, 생산, 교역, 복지 등이 물질적 보편가치죠. 보편문명은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여러 다른 문명 간의 상부상조적 교류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어요.”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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