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한 중동 국가에서 대규모 건설사업을 수주한 국내 A건설사. 이 회사는 다른 국내 업체들에 하도급을 주면서 계약 불이행 시 런던상사중재원(LCIA)에서 분쟁 해결을 한다는 조항을 붙였다가 낭패를 봤다. 발주처(중동 국가)와 계약할 당시 넣었던 조항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사용한 게 화근이었다. 국내 업체끼리 런던에서 중재 절차를 거치느라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게 들었다. 번역 작업과 현지 로펌 비용 등이 만만치 않았다.
#베트남에 법인을 세운 기업가 B씨는 현지 기업들과 계약하면서 분쟁 조정 항목에 ‘준거법(한국법), 중재기관(대한상사중재원), 중재지(서울)’를 명확히 정했다. 코로나19로 현지 업체가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베트남 현지 법원이 아니라 국내에서 분쟁조정 절차를 밟고 있다.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3심제 소송과 달리 중재는 단 한 번의 판정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게 최대 장점이다. 당사자가 중재판정부(단독중재인 혹은 3인의 중재판정부) 선임에 참여할 수 있고 중재절차가 소송과 달리 공개되지 않아 기업의 부담이 작다.
적지 않은 국내 기업은 그간 분쟁 발생 가능성과 분쟁 해결의 중요성을 간과해온 측면이 있다.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센터의 권희환 국제협력팀장은 “법원의 판결과 동일한 법률적 효력이 발생하는 동시에 뉴욕협약에 의해 외국 법원에서도 중재 결과에 대한 강제 집행 등이 보장된다”며 “더 충실하고 유연하게 당사자의 진술과 참여가 보장되는 중재를 통해 기업 간 분쟁을 해결하려는 수요가 점차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KCAB에 접수된 중재 사건은 1966년 설립 이후 사상 최대인 443건이었다. 이 중 70건이 최소한 한 당사자가 외국 당사자인 국제중재 케이스다. 2018년에 비해 국제중재 사건은 12.9% 증가했다. 지난해 중재 사건 규모는 아시아 대표적 중재기관인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다음으로 많은 것이다. 한때 아시아의 중재 허브로 불리던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보다도 사건이 많았다. 지난해 청구금액(분쟁금액)은 8억7500만달러(약 1조원)로 증가했다.
괄목할 만한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올해 전체 중재 접수 건수(10월 16일 기준)는 약 13% 줄었지만 국제중재사건은 동기 대비 9% 늘어났다는 점이다.
임수현 KCAB 국제중재센터 사무총장(변호사)은 “한국은 대륙법 체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영미법에 능통한 법률가가 많고 지정학적 위치, 중립적 판결 성향, 국가 인지도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국제중재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임 총장은 “지난해 KCAB 접수 건수뿐만 아니라 분쟁금액이 1000억원이 넘는 대형 사건도 2018년에 비해 200% 증가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치면서 이동이 자유롭지 않자 국제 중재 시장도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맞고 있다. 분쟁 당사자와 중재인(판결을 내리는 판정부), 법률대리인 등이 런던 파리 싱가포르에 모여 하루 8시간 이상, 며칠에서 길게는 1~2주씩 머리를 맞대고 심리를 하던 관행에 변화가 불가피해져서다. 안정적인 인터넷 인프라와 최첨단 장비, 정보기술(IT)이 뒷받침된 한국의 화상 중재 및 심리가 각광받고 있다.
지난 6월 한국 기업이 베트남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분쟁에선 일본인 단독중재인(도쿄)과 한국 기업 대리인(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KCAB 국제중재센터), 베트남 기업 대리인(호찌민)이 화상으로 회의 및 심리를 진행했다. 해외 유수 중재기관도 서울의 시설을 이용해 화상심리를 열겠다고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다.
국제중재인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신희택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센터 의장은 “가능할까 싶던 화상중재와 심리가 이동시간 등을 줄여 효율성을 높여주는 동시에 당사자의 표정과 진술을 보고듣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놀랐다”며 “한국은 IT강국이란 국제적인 명성을 바탕으로 화상심리에 대한 해외의 요청 및 수요가 점차 커지고 있어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고 강조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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