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부 개척시대 미국 술집에서 식사를 덤으로 제공하는 마케팅이 유행했다. 저녁에 술을 한 잔 마시면 다음날 점심이 무료였다. 이 ‘공짜 점심’에 혹해 많은 애주가가 몰려들었다. 그런데 음식 간이 꽤 짭짤해서 한 점 두 점 먹다 보면 결국 맥주를 연거푸 시켜야 했다. 공짜인 줄 알았던 식사가 술값에 모두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을 손님들은 영수증을 받아들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기서 탄생한 말이 “공짜 점심은 없다”이다.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누구나 아는 이 명언을 인용했다가 호되게 당한 사람이 있다. 금융정책 사령탑인 은성수 금융위원장이다. 파생결합펀드(DLF) 사건으로 시끄럽던 지난해 10월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있듯 투자자들도 수익률과 안전성을 잘 보고 판단해 달라”고 말했다. 불완전 판매를 근절할 대책과 별개로 투자자도 자기 책임의 원칙을 잊지 말아달라는 취지였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금융위원회 앞에서 항의 집회가 들끓었다. 국회에선 “금융위원장이 할 소리냐”는 호통이 쏟아졌다. 이후 은 위원장은 공개석상에서 공짜 점심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저금리·저성장이 굳어질수록 고위험·고수익의 유혹은 강렬해지게 마련이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원칙이 투자자의 자기 책임이다. 현실은 반대로 흘러갔다. 평범한 개인 투자자들에게 ‘손실이 나더라도 원금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조치가 이어지고 있다.
금융권에서 펑펑 터져나오는 사모펀드 부실 사태의 수습책으로 ‘선(先)배상 카드’가 잇달아 등장했다. 쉽게 말하면 일단 투자자에게 돈부터 물어주고, 정산은 나중에 하자는 것이다. 라임 무역금융펀드를 판매한 우리은행, 신한금융투자, 하나은행, 미래에셋대우는 원금 전액을 배상하라는 금융감독원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투자 손실을 100% 반환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한국투자증권은 옵티머스 펀드 투자자에게 원금의 90%를 선지급하기로 했다. 하나은행과 기업은행도 디스커버리펀드 투자금의 50%를 미리 내줬다.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것, 금융회사와 당국 모두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당장의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에 이보다 손쉬운 방법은 없다. 금융사는 최고경영자(CEO)를 위기에서 구하고, 금감원은 감독 부실에 쏟아지는 화살을 돌릴 수 있다. 손실 보전을 금지한 자본시장법과 충돌하고 형법상 배임에 해당할 소지도 있다는 점에는 슬쩍 눈을 감았다.
빅히트 주가가 급락해 손실을 본 개미들이 최근 ‘빅히트 주식 환불 추진 모임’을 결성했다고 한다. ‘따따상’을 꿈꿨는데 반토막을 맛본 그 심정 이해하지만, 주식이 환불 대상이라는 발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럽다. 금감원은 손실이 확정되지 않은 펀드에 추정 손해액을 기준으로 선배상하는 방안을 제도화하겠다는 계획까지 내놨다. 앞으로 손실 나는 상품마다 ‘환불원정대’가 생겨나는 건 아닌지. 투자자의 눈물을 닦아준다는 명분이 투자자의 책임을 압도하고 있는 2020년, 공짜 점심은 한국 금융이 다시 곱씹어봐야 할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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