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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16일부터 한국은행법의 설립 목적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는 내용의 한은법 개정안을 심의한다.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미국 중앙은행(Fed)처럼 전통적인 물가안정 역할만 고집하지 말고 금융 시장에 적극 뛰어들어 개입하라는 취지다. 한은 측은 내심 “고용 안정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마땅하지 않다”며 다소 소극적인 입장이다. 정치권은 “저물가, 저성장 시대에 물가안정만 고집할 거면 조직, 인력을 대폭 축소하라”며 한은을 압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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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에서 한은법 개정안은 총 다섯 건 발의됐다. 이중 4건이 한은의 역할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관 상임위인 기재위 야당 간사인 류성걸 의원이 한은법 1조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는 개정법을 대표 발의했고, 여당 간사인 고용진 의원도 이 법안의 발의자 명단에 올랐다. 고 의원(사진)은 “당분간 한국은행이 가만히 있더라도 ‘2% 미만’의 저물가가 지속된다”며 “이번 국정감사에서 경제 활력 제고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한은법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에 여야가 공감대를 이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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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정치권이 잇따라 법안 발의에 나선 이유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같은 경제·사회 위기에서 한국은행이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어서다. 실제 Fed는 3월초 코로나19 사태로 증시가 폭락하자 △무제한 양적완화(QE) 시행 △기업어음(CP) 직접 매입(CPFF) △신규 발행 및 유통시장 회사채·대출채권 직접 매입 △정부의 근로자보호프로그램(PPP) 담보 대출 허용 등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신속하게 폈다.
Fed 이코노미스트 출신의 김진일 고려대 교수는 “Fed는 위기 발생 후 이런 비전통적 통화정책들을 신속하게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이 서로 책임 소재를 따지다 이를 명확하게 정하기 위해 국회에서 법(산업은행법)을 개정하기도 했었다. 항공·해운 등 국내 기간 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기간산업안정기금’의 경우 5월 말 관련 조직이 출범했고, 실제 자금은 7월 중순 집행됐다.
이런 정치권 움직임에 대해 한은은 공개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지만 조직 내부에선 못마땅하다는 눈치가 역력하다. 고용안정은 기본적으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아닌 정부의 경제정책이라는 이유에서다. 한은 조사국장 출신인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고용안정을 뒷받침할 한은의 정책 수단이 많지 않아 법을 바꾸더라도 통화정책의 실효성은 크지 않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다수의 민간 전문가들은 “한은이 과거 고성장, 고물가 시대의 중앙은행 역할만 고집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기재부 차관 출신인 류 의원은 “정부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수년 전부터 한은에 대해 ‘절간 같다’, ‘구름 위에서 신선놀음 한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며 “물가안정 역할만 고집하려면 조직, 인력을 축소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은 직원수는 지난해 기준 약 2500명으로 정부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230명)와 금융감독원(2200명)을 합친 숫자보다 많다.
전문가들은 금통위가 고의 또는 중대과실로 한은에 손해를 끼친 경우 금통위원들도 손해배상책임을 지도록 규정한 법 25조도 신속한 자금 지원을 꺼리게 만드는 규정이라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금융위, 공정거래위, 방송통신위 등 국내 합의제 정책기관은 물론 해외 중앙은행법에도 유사한 규정이 없다”고 전했다.
이번 한은법 개정작업은 2011년 한은 설립 목적에 ‘금융안정’ 역할이 추가된 이후 약 10년 만이다. 한은과 정부, 전문가 의견 수렴 등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되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2011년 법 개정도 2008년 7월 당시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첫 입법안을 낸 지 3년만에 이뤄졌다. 고 의원은 “중앙은행의 기능과 역할에 커다란 변화를 논의하는 법”이라며 “전문가 의견 수렴 절차와 심도있는 논쟁을 통해 신중하게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좌동욱/김익환 기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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