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16일부터 한국은행 설립 목적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는 내용의 한국은행법 개정안을 본격 심의한다. 한국은행도 미국 중앙은행(Fed)처럼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물가 안정만 고집하지 말고 금융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고용 안정을 도모하라는 취지다. 한은은 “고용 안정을 위한 한은의 수단이 마땅하지 않다”며 다소 소극적인 입장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은 “저성장·저물가 시대에 물가 안정만 추구할 것이라면 조직과 인력을 대폭 축소하라”며 한은을 압박하고 있다.
여야 의원 잇따라 한은법 발의
류성걸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장은 15일 “내일(16일)부터 소위를 열어 한은법 개정안을 심의한다”며 “관련 전문가, 한은, 정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법안을 심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회는 한은 측 입장을 듣기 위해 회의 참석을 요청했고, 이승헌 한은 부총재가 회의에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21대 국회에서 한은법 개정안은 총 다섯 건 발의돼 있다. 상임위인 기재위의 야당 간사인 류 의원은 한은법 1조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는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개정안에는 여당 간사인 고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공동 발의자로 올라 있다. 이처럼 여야 정치권이 발벗고 나선 이유는 경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Fed 등 외국 중앙은행에 비해 한은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어서다. 고 의원은 “당분간은 한은이 가만히 있어도 ‘2% 미만’의 저물가가 지속된다”며 “이번 국정감사에서 한은이 경제 활력 제고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법을 바꿔야 한다는 데 여야가 공감대를 이뤘다”고 전했다.
“한은도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주요 쟁점은 크게 △한은 설립목적(1조)에 고용 안정 추가 △긴급여신지원(80조) 요건 완화 △금융통화위원회의 손해배상책임 제외 등 세 가지다. 한은법 1조 개정안은 학계에서도 논쟁이 뜨겁다.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해 물가 안정을 도모한다’는 한은법 1조를 ‘물가 안정과 고용 안정을 도모한다’는 문구로 바꾸는 내용이다. 류 의원은 이에 더해 의결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 사항에 ‘고용 안정을 위한 금융지원에 관한 사항(28조)’을 추가했고, 한은이 ‘통계자료 제출 요구권(86조2항)’을 갖는 조항도 신설했다.
한은은 공식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지만 조직 내부에선 못마땅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고용 안정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아니라 정부의 재정정책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한은 조사국장 출신인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고용 안정을 뒷받침할 한은의 정책 수단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은이 과거 고성장, 고물가 시대의 중앙은행 역할을 고집한다”는 지적도 있다. 기획재정부 차관 출신인 류 의원은 “한은이 물가 안정 기능만 수행하려면 조직, 인력을 축소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은 임직원은 약 2500명(2019년 말 기준)으로 정부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230명)와 금융감독원(2200명)을 합친 수보다 많다.
“경제위기 땐 회사채 매입 가능해야”
긴급여신지원 조항(80조2항)을 담은 법안은 법제사법위원장인 윤호중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경제 위기 시 금융통화위원 5명(총 7명)의 찬성으로 영리 기업의 회사채를 적극 매입할 수 있도록 했다. 국회가 2011년 한은법을 바꾸면서 영리기업에 대한 여신 업무 규정(80조)을 완화했지만, 학계를 중심으로 한은이 여전히 민간 기업과의 거래를 꺼린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민간과의 거래를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한은법 79조와 채권 매입 대상을 국채 등 정부 보증 채권으로 제한하는 조항(68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금통위가 고의 또는 중대 과실로 한은에 손해를 끼친 경우 금통위원들도 손해배상책임을 지도록 규정한 법 25조도 신속한 자금 지원을 막는 법 규정으로 꼽힌다. 임정하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금융위, 공정거래위, 방송통신위 등 국내 합의제 정책기관은 물론 해외 중앙은행법에는 없는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좌동욱/김익환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