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든 피겨스'로 본 노동시장의 차별

입력 2020-11-20 17:22   수정 2020-11-21 01:54


1960년대 미국은 조급했다. 러시아에 맞서 우주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한 발짝 뒤에서 쫓아가기 바빴다. 러시아가 유리 가가린을 태운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동안 미국의 우주선은 대기권도 뚫지 못하고 불덩이가 됐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미국항공우주국(NASA) 직원들은 우주선을 쏘아 올리기 위해 손으로 수많은 계산을 해야 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남성 직원들이 우주선의 궤적을 그리고 계산을 하면 백인과 흑인 여성들이 계산을 복기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사람이 우주에 가는 것보다 흑인과 백인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게 더 어려워보였던 시절, NASA에서 계산을 담당했던 흑인 여성 세 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능력 밖의 이유로 차별받던 주인공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능력을 펼치게 되는 게 핵심 줄거리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된 나사의 유인 우주선 프로젝트인 머큐리 계획에 크게 기여했던 사람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차이를 차별하던 시대
영화는 소수자가 노동시장에서 받는 직간접적 차별을 그렸다. 세 주인공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버스 뒤칸에 앉아야 하고, 사무실 안의 커피포트조차 백인과 같이 쓸 수 없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와 굽 높은 구두를 신어야 하고 정부 관료가 참석한 주요 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캐서린이 건물 밖에 있는 유색인종 여자 화장실을 쓰려고 빗속을 달리는 장면은 흑인 여성이 시달렸던 겹겹의 차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세 주인공에 대한 차별은 직접적일 때도 있지만 간접적으로도 이어졌다. 간접차별은 인종 및 성별을 기준으로 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특정 집단에 불이익을 야기하는 차별을 의미한다. 엔지니어 팀장이 전직을 권할 정도로 자질이 있는 메리는 엔지니어를 꿈꾸지 못한다. NASA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려면 버지니아대 및 햄프턴고교의 학위가 필요해서다. 언뜻 성별, 인종과는 무관하게 보이는 공정한 학력 조건이지만 알고 보면 두 곳 모두 흑인의 입학을 받아준 적이 없는 학교다. 메리는 햄프턴고교에 들어가기 위해 법원에 청원을 내고, 이 학교 최초의 흑인 여성 학생이 된다.
저임금·저숙련 직종에 몰린 흑인 여성
노동시장에서 인종과 성에 따른 차별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용 인원의 차이가 대표적이다. 영화 속 NASA 우주임무본부 사무실엔 수십 명의 직원이 일하지만 여성은 둘뿐이다. 본부장 업무를 보조하는 백인 비서와 계산실에서 뛰어난 수학능력을 인정받아 임시 발령을 받은 주인공 캐서린이 전부다.

집단에 따라 맡는 일이 다른 ‘직종분리 현상’도 드러난다. 직종분리는 중요도가 낮고 미래가 밝지 않은 직업에는 소수자가 몰리는 현상을 뜻한다. 영화 속 NASA에서 전체 직원 가운데 흑인 여성의 비중은 낮지만, 계산을 검토하는 부서만큼은 흑인 여성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계산실은 기술 발전에 따라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단순업무직이다. 영화 중반 최초의 IBM 컴퓨터가 NASA에 도입되면서 계산실 직원들은 단체로 해고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직종분리 현상은 ‘붐빔현상’으로 이어진다. 직업의 기회가 제한된 소수자들이 특정 직업군에만 몰리면서 실업률은 올라가고 평균 임금은 떨어지는 현상이다. 경제학자들은 성별 임금격차, 인종 간 임금격차를 설명할 때 붐빔현상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2018년 기준 미국 여성(평균)은 미국 남성 임금의 83% 수준만 받는다. 영화속 배경인 1960~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비중은 60%대까지 떨어진다.

영화 속 캐서린의 한마디는 그가 노동시장에서 겪은 차별과 임금격차를 집약해서 드러낸다. “그거 알고는 있었나요? 저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하루 800m를 걸어야 해요. 무릎 밑까지 오는 치마에 힐도 신어야 하고, 그리고 진주목걸이라뇨? 전 진주목걸이가 없어요. 흑인한테는 진주를 살만큼의 급여를 주지 않으니까요.”
노동시장에서 차별이 일어나는 이유
경제학자들은 노동시장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원인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는 ‘개인편견이론’으로 차별을 설명했다. 차별적인 고용주 및 동료 근로자 때문에 동일한 생산성을 가진 흑인·여성 근로자가 백인·남성보다 낮은 임금으로 고용된다는 게 이론의 핵심이다. 차별적인 고용주는 동일한 생산성을 지닌 근로자라도 인종 및 성별에 따라 다른 임금을 준다.

<그래프1>을 차별적인 고용주 때문에 소수자가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는 현상을 도식화했다. 차별적인 고용주가 있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소수자 채용이 늘수록 어느 시점(A)부터 평균임금 대비 소수자의 임금을 뜻하는 상대임금은 줄어든다. 소수자의 사회 진출이 늘어 공급 그래프가 S1에서 S2로 이동하면 상대임금은 더 떨어진다. 상대임금이 올라갈 때는 시장에서 차별의 폭이 줄거나(D→D2) 차별하는 고용주가 줄어드는(A→A1) 경우뿐이다.

근로자의 편견 때문에도 차별이 생긴다. 영화 속 캐서린의 사무실 동료인 폴은 캐서린에게 주요 정보를 검게 칠한 뒤 계산을 검토하라고 준다. 캐서린이 기존 백인 남성 중심의 사무실 문화에 변화를 가져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료 근로자가 차별적이라면 고용주는 소수자를 고용할 때 이들의 반발을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반발을 줄이는 손쉬운 방법으로 기존 근로자보다 소수자의 임금을 깎거나 기존 근로자의 임금을 더 주는 식으로 차별한다고 개인편견이론은 설명한다.
차별하는 경영자는 도태된다
경제학자들은 노동시장의 차별을 비효율로 바라본다. 동일한 생산능력을 지녔는데도 특정 집단에 더 높은 임금을 주는 것은 고용주와 근로자의 개인적 효용을 늘릴 수는 있지만, 집단 전체 이익은 포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차별하는 경영자는 도태된다. 대신 근로자의 생산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경영자가 살아남는다. 인력 확보 경쟁이 치열할수록 낮은 임금을 받던 흑인, 여성 근로자가 차별이 덜한 회사로 이탈하기 쉬워진다. 인력 이탈은 조직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 로 노동시장 차별은 경쟁적인 산업군에 있는 기업보다 금융권처럼 정부 허가가 필요한 비경쟁적인 시장에 속한 기업들에서 더 흔하게 발견된다.

‘히든 피겨스’ 속 NASA에선 러시아와의 우주개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도 옅어진다.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데 필요한 해석기하학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든 중책을 맡겨야 목표를 빨리 달성할 수 있어서다. 조직이 성과에 집중할수록 인종과 성별로 인한 차별은 후순위가 된다. NASA가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릴 수 있었던 건 사무실 커피포트 위의 흑인 전용 표시를 떼고, 유색인종 화장실을 없애고, 사상 처음으로 흑인 여성을 엔지니어로 고용하면서였다는 점을 영화는 뚜렷하게 보여준다.

“요즘 NASA도 여성을 고용하나요?” 어떤 사람의 질문에 캐서린은 답한다. “NASA가 제게 일을 맡긴 이유는 우리가 치마를 입어서가 아니라 안경을 썼기 때문이에요.” 성과를 내는 조직이라면 사람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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