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들어 동아지중해에서는 항로 확보 등을 둘러싼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 등 해양력 경쟁체제가 만들어졌다. 국가들의 역학관계에도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가야 세력들은 남해항로의 독점권을 빼앗기고 무역의 이익이 분산되면서 그 위상이 약해졌다. 해양국가인 데다 연맹체제를 벗어나지 못해 효율적인 관리와 조직적인 통제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가야의 핵심 세력은 이 한계들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일본 열도로 더욱 진출했다. 남은 세력들 가운데 낙동강 중류의 수로망을 장악한 대가야와 남강·남해안의 항구를 가진 아라가야는 고령의 지산동 32호, 44호분과 함안의 말이산 34호분에서 기마용 장비들이 출토된 것처럼 제철문화를 발전시켰고, 일본 열도와 교류했다.
또 하나가 양안 국가설(윤명철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년)이다. 나는 1994년에 배로 지중해와 흑해를 왕복하면서 그리스의 폴리스들,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등이 바다를 사이에 둔 ‘양안(兩岸) 국가’ 또는 식민 모국(母國)과 자국(子國)의 2중 체제였음을 깨달았다. 또한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스페인의 ‘지브롤터’는 영국 영토이고, 반대로 아프리카의 ‘세우타’는 스페인 영토라는 사실에도 놀랐다. 그렇다면 가야는 원격통치를 하는 양안 국가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 열도에 오랫동안 진출하면서 교류했고, 대한해협은 교통과 통신이 가능할 정도로 짧은 거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열도 북부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건국신화 등은 이런 상황을 뒷받침한다.
이 신화는 기본 줄거리가 단군신화와 김수로왕 신화처럼 천손강림 신화다. 내용은 물론이고 붉은 천에 쌓여 내려온 지명도 거의 비슷하다(구시후루는 구지봉과 음이 비슷함). 이 때문에 가야계 집단이 일본 열도에 도착해 고대국가를 형성한 과정으로 해석한다. 물론 정치력이나 군사력, 그리고 국제질서를 고려하면 주체는 원가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한 주체는 당시 상황을 모호하게 서술함으로써 종속적이었던 왜 집단을 주체인 것처럼 해석하는 ‘임나일본부설’과 ‘기마민족국가설’을 낳게 만들었다(천관우). 가야계 지명은 지금도 쓰시마(대마도)나 규슈 북부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천손을 모시는 기리시마 신궁 근처에는 ‘가라구니다케(韓國岳)’가 있다. 고대부터 항해자들이 처음 도착하는 규슈 북부에는 ‘가라의 항구’라는 뜻인 ‘가라쓰’가 있는데, 원래는 ‘한진(韓津)’으로 사용했으나 14세기부터 ‘당진(唐津)’으로 바꿔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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