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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저녁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법관에 대한 불법사찰’ 혐의 등을 이유로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직무집행 정지 명령을 발표했다. 사상 초유의 조치에 나선 근거로 군사정권 시절 정보기관이 감시와 미행, 도청 등의 불법적인 방법으로 주요 인사의 약점을 캐던 구태가 연상되는 ‘사찰(査察)’이란 단어가 동원됐다.
추 장관의 사례처럼 용어를 과장·왜곡해서 사회적 마찰을 일으키고,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경우를 접하는 경험이 최근 몇 년 새 부쩍 늘었다. ‘적폐 청산’ ‘개혁’이라는 표현은 어느덧 정치적 반대파를 억압할 때 사용하는 낡은 레토릭이 됐다. 70여 년 전 물리적으로 사라졌던 ‘친일파’는 비판자들의 입을 막는 과정에서 강제로 되살아났다. 파시즘적 대중 압력은 ‘민주적 통제’로 미화됐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월성 원전의 경제성을 조작하고 자료를 폐기한 산업통상자원부를 찾아가 “적극적으로 행정에 임해 달라”고 강변했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은 법무부와 검찰 간 대립상에 대해 공(公)과 사(私)가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한 ‘선공후사(先公後私)’ 발언을 내놨다.
경제 분야라고 무풍지대가 아니다. 서민의 주거불안을 키운 주택임대차보호법은 ‘보호법’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됐다. 경영진을 옥죄고 기업의 팔을 꺾는 규제는 ‘공정경제’로 둔갑했다.
이처럼 정권에서 나오는 언어·용어들은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좋은 뜻을 지닌 단어를 다 가져다 쓰고, 나쁜 말은 상대편에 뒤집어씌운 탓에 각 단어가 원래 담고 있던 의미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올바른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가치관이 명칭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용어 자체가 사건의 성격을 정의 내리고, 정당성을 부여하며, 행동을 속박한다. 대규모 집단의 움직임을 두고 반란(反亂)이나 봉기(蜂起·벌떼처럼 들고 일어섬)로 부른다면 그 움직임은 진압돼야만 하는 것이고 의거(義擧), 혁명(革命)으로 칭한다면 꼭 이뤄야만 하는 사명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언(正言)과 정명(正名)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치권의 왜곡되고 오용된 언어가 채우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현실을 왜곡된 언어로 분칠한다고 해서 본질이 바뀔 수는 없다. 환부를 더 썩게 할 뿐이다. 올바른 언어의 회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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