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행동주의 펀드 베테랑들이 이끄는 한 행동주의 투자기업이 ‘친환경 에너지 트렌드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라’며 미국 기성 에너지기업 대표주자 격인 엑슨모빌을 겨냥하고 나섰다. 최근 세계 각국이 30~40년내에 탄소 중립(넷제로)을 이루겠다고 잇따라 공언하는 가운데 기업에 대한 월가 투자자들의 대책 요구가 거세지는 분위기다.
7일(현지시간) CNBC에 따르면 이날 미국 투자기업 엔진넘버원이 엑슨모빌 이사회에 풍력기업 전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신재생에너지 전문가 등 신규 이사 네 명을 선임하고자 한다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10명으로 구성된 엑슨모빌 이사진 중 40%를 갈아치우겠다는 경고다. 엑슨모빌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서한 내용을 검토 중”이라고만 밝혔다.
엔진넘버원은 “엑슨모빌은 오랫동안 실적이 저조하고, 많은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었다”며 “이러다간 한때 미국 대표기업까지 올랐다가 쓰러져버린 다른 기업들의 전례를 따를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엑슨모빌의 주가가 올들어 40% 이상 하락했고, 이는 동종업계 다른 회사보다도 더 뒤처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같은 기간 미국 30개 에너지주 추종 상장지수펀드(ETF)인 에너지 셀렉트 SPDR(XLE)는 32% 내렸다는 설명이다. 엔진넘버원은 “엑슨모빌의 주가가 급격히 내린 뒤에도 지난주 기준 엑슨모빌에 대해 매수 의견을 낸 애널리스트는 14%에 불과하다”고 썼다.
엔진넘버원은 엑슨모빌에 지출을 줄여 배당금을 보전하라고도 요구했다. 석유 시추 등 수익이 하락세인 사업에 공격적인 지출을 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엑슨모빌이 지난주에 2022~2025년 자본지출 계획을 기존 대비 200억~250억달러 가량 줄이겠다고 한 비용절감안에 대해선 충분치 않은 조치라고 평가했다. 석유 탐사와 생산에 투자한 자본 수익률이 2000년부터 10년간은 35%에 달했지만, 최근엔 6%대로 감소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새로운 성과 지표를 만들어 이에 따라 경영진 보상을 결정하라고도 요구했다.
엔진넘버원 관계자는 CNBC에 “세계 각국이 화석연료에 거리를 두고 있는 와중에 수십년 내에 무가치해질 수도 있는 기업의 방향을 바꾸는게 장기 목표”라고 설명했다.
유명 헤지펀드 베테랑들이 이끌고 있어 신생기업인데도 미국 2위 연기금인 ‘큰 손’ 캘리포니아주 교직원연금(CalSTRS)의 적극 지원을 확보했다. 이 연금이 보유한 엑슨모빌 주식 규모는 3억달러가 넘는다.
캘리포니아주 교직원연금 크리스 알리만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연금이 앞서도 기후행동 100+에 동참하는 등 점점 행동주의 주주 성향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엑슨모빌의 경영 전략을 바꿔보려고 노력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며 “엑슨모빌은 석유 시추를 늘리는 등 성공 못 할 사업만 벌여 돈을 공중에 뿌리고 있는데, 미래는 다른 모습일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엔진넘버원은 래리 핑크 블랙록 CEO에도 서한을 보내 조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지난 1월부터 기후관련 대응책을 요구하는 투자자 연합인 기후행동 100+에 동참하고 있다. CNBC는 “엔진넘버원이 블랙록 등 거대 투자기업을 설득한다면 제안에 힘이 실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WSJ는 “엔진넘버원의 보유지분이 크진 않지만, 이미 상당히 쌓여있는 투자자들의 불만을 더 자극해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엑슨모빌은 올해 1982년 이후 처음으로 배당금을 올리지 않아 투자자들의 불만을 샀다. 지난 10년간 배당금을 포함한 총 주주수익률은 -20%다. 같은 기간 S&P500 수익률이 277%에 달한 것에 대비하면 현저히 낮다. 지난 9월부터는 다우지수에서 퇴출당해 인덱스펀드도 상당수 빠졌다. 한 기관투자자는 CNBC에 “최근 엑슨모빌 주요 투자자들의 불만은 최악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는 작년부터 셰브런, 로열더치셸, BP 등 주요 에너지기업이 각국 정부와 투자자들을 의식해 탄소 배출량을 줄이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것과는 딴판이다. 이들 기업은 에너지 트렌드 변화를 대비해 태양열·태양광, 원자력, 수소에너지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있다.
금융정보서비스기업 모닝스타의 재키 쿡 스튜어드십연구 책임자는 “이번 제안이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대규모 연기금이 지원하고 있어 기후 거버넌스에 대한 제안을 해볼만 하다”며 “기존 이사진으로는 극적인 턴어라운드를 이루기 어려운 만큼 이사진 교체가 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속가능투자를 추구하는 기관투자자 연합 세레스의 앤드류 로건 석유·가스연구부문장은 “엑슨모빌은 기후 리스크 측면 뿐 아니라 석유와 가스 산업에서도 뒤떨어져 있다”며 “이사회도 에너지 전문가가 적은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엑슨모빌 이사회는 존슨앤존슨, IBM, 메트라이프 등 에너지분야와는 관련이 없는 기업 임원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로건 부문장은 “투자자들은 이제 각 기업이 저절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했다”며 “이때문에 기업에 강한 압박을 가하기 위해 이사진 교체 카드까지 내세운 것”이라고 분석했다.
CNBC는 “지속가능 성장과 탄소배출량 감축이 중요해진 전환기에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대기업에 장기전략을 바꾸라고 공격한 사례”라며 “향후 에너지업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엑슨모빌 주가는 이날 1.9% 하락했다. 같은날 S&P500지수는 0.2% 하락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