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망중산책

입력 2020-12-08 17:48   수정 2020-12-09 00:16

책 제목으로 ‘쉼’과 ‘멈춤’ 등의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가다가 힘들면 잠시 멈추고 쉬어가면 되지 뭘 책으로 써내기까지 하나?’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두 단어를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나도 쉼과 멈춤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직장 생활 외에도 주 1회 고조리서를 연구하는 일을 벌였다. 두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수면시간은 두 시간 줄어들고 노동 시간은 곱절로 늘어났다. 시간을 다퉈야 하는 일이 많이 생기니 하루 열 발자국이나 걸을까. 언제 걸었는지 생각도 안 난다.

중국 철학서 《장자·추수》엔 연나라 사람이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갔는데 한단 사람들이 걷는 모습이 너무 멋져서 그 걸음걸이를 따라 하다가 원래 자기가 걷던 방법도 잊어버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러다 나도 내가 걸었던 걸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루 한 시간이라도 걸으라는 의사 선생님 권유에 ‘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지만, 현실 생활에서는 단 10분도 빼기 어려우니 이게 무슨 일인가. 오늘은 한번 걸어봐야겠다. 크게 마음먹고 산책을 감행해본다. 인왕산 둘레길을 걸어볼 참인데 복장은 히말라야라도 갈 태세다.

날은 이미 추워질 대로 추워져서 맨 먼저 머리에 찬바람이 쌩하니 스친다. 집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나 산책하러 가야 하나 마음 안에서 한바탕 시소 놀이가 벌어지더니 그래도 산책하기로 하고 몇 발 내디디니 벌써 둘레길에 닿았다.

가을에는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경쾌하기도 했었는데 겨울이 되고 서리를 맞더니 낙엽은 이미 젖을 대로 젖어 땅에 달라붙어 있다. 한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하늘을 볼 수 없었는데 잎이 모두 지자 푸른 하늘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구나. 앙상한 가지에도 새들의 합창은 이어지고 내년 봄을 수놓을 개나리는 올해 꽃 피었던 그 자리만 남아있다.

자연은 또 이치에 따라서 제 소임을 다하고 스러지고 또 피고 하거늘 어찌하여 내 욕심은 스러지지 않고 계속 채우고 싶은 건가? 잠시 나를 돌아보던 중 어느새 전망대에 도착했다. 한눈에 펼쳐지는 풍경이라니. 바로 앞에 경복궁, 그 너머 창경궁, 종로, 을지로, 동대문, 멀리 잠실까지…. 그야말로 서울이 한눈에 들어온다. 두 팔을 벌려 심호흡도 해보고 어디가 어딘지 안내도 하고 대조도 해본다.

대강 서울의 위치 파악이 끝나니 긴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모든 걸 잊는 넋놓기를 해본다. 짧은 휴식은 춥고도 낯설었지만 잠시 일상과 다른 온도를 맛봤다.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빨강 신호등 앞에 선 느낌이랄까. 달릴 때는 물 한 모금 마실 여유도 갖지 못하다가 잠깐 짬 내어 물 한 모금 먹을 수 있는 시간이니 얼마나 짜릿하고 감사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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