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AI(인공지능) 팔다리일 뿐인가.”
쿠팡과 배달의 민족, 카카오 등 플랫폼 기술의 발달이 새로운 고용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이끌고 있다. 물류센터와 배달, 대리운전 등 손가락 터치 몇 번만으로 원하는 시간에 돈 버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N잡’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디어 매체의 편집장이었던 저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직접 몸으로 겪은 200일 플랫폼 노동의 기록을 담아 ‘뭐든 다 배달합니다(메디치미디어)’를 펴냈다. 쿠팡 물류센터로 시작해 자전거를 타고 배민 커넥터로 일했다. 대리기사 일도 병행했다. 다양한 에피소드에서 저자의 인간애와 유머가 느껴진다. 직접 그린 삽화는 현실감을 더한다.
단순한 경험 전달에 그치지 않고 플랫폼 노동의 의미와 현실,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날카롭게 관찰한다. 플랫폼 기술의 발전은 숙련 노동자의 필요성을 갈수록 낮아지게 만들고 있다. AI가 물류센터에선 배차를 추천하고, 대리 기사에겐 길을 안내해주기 때문이다. 노동자 관점에선 쉽게 일을 구할 수 있지만, 좋은 대우를 기대하긴 어려워진다.
배달과 대리운전의 경우 적지 않은 시간을 스마트폰을 붙들고 대기해야 한다는 점도 고역이다. 다양한 사람과 끊임없이 만나면서도 정서적 불안과 고독을 피해가기 어렵다. 동료들의 얼굴이 자주 바뀌는 만큼 조직화도 어려워 보호의 사각지대에 존재한다. 대부분 고용보험에 들 수도 없고 대출도 받지 못한다. 저자가 긍정적인 태도로 일하면서도 ‘현대판 소작농’이란 불편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은 인터넷을 이용한 상거래 시장을 더욱 빠른 속도로 키우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플랫폼 노동자를 현재 50만명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를 포함해 이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여전히 플랫폼 노동자의 일원으로 배달 일을 나가는 저자는 기본소득과 사회안전망 등 구조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배달 등을 전문적인 직업으로 여기는 일이 중요한 출발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메디치미디어, 272쪽, 1만4000원)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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